기억할만한지나침

2007년 가을《작가세계》배수아 특집, 세계사, 2007.

시월의숲 2009. 8. 5. 20:14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는 사진이거나 그림이었다. 화려한 색의 양철이거나 마분지나 색종이 혹은 털실뭉치거나 단추가 달린 헝겊이었다. 그들의 행복한 미소나 표정, 파도에 젖지 않게 붙잡고 있는 옷자락이나 줄에 묶인 개들과 펼쳐든 양산도, 그리고 웃음소리와 유쾌한 분위기까지도 모두 움직임이 없이 풍경의 화면에 고정된 채였다. 파도만이 규칙적인 템포로 그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녀의 머리도 그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따라서 한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밀려온 파도는 다시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게 아니라 그녀의 내부에 그대로 쌓여갔다. 그녀의 어떤 부분은 그렇게 익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점점 차 올라오는 물은 곧 슬픔의 수위를 가리켰다. 그것은 그녀가 혼자서 온몸으로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무거운 슬픔이었다. 마음이 침울하게 가라앉는다거나 우울해지는 것이 아닌, 폭포처럼 쏟아지는 격앙된 감정, 통제할 수 없는 파도를 타고 극단의 해변으로 정신없이 밀려가는 느낌이었다. 김씨의 부인은 고개를 돌리고, 자신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옆 자리에 앉은 어떤 사람을 향해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슬픈지 이유를 모르겠어요.(43쪽)

 

 

- 배수아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