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미시마 유키오,《가면의 고백》, 동방미디어, 1996.

시월의숲 2009. 8. 23. 10:31

나의 직감은 내가 분명히 고독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불안 ― 벌써 유년 시절부터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짙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 으로 나타났다. 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언제나 이상한, 예리한 불안이 함께 따라왔다.…… 미래에 대한 나의 막연한 불안은, 한편으로는 현실을 벗어난 몽상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과 함께 나를 그 몽상 속으로 도망치게 해주는 <악습>으로 몰아세웠다. 불안이 그것을 시인하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너는 분명히 죽을 거야."

  친구들은 나의 허약함을 그렇게 비웃었다.

  "그 말, 너무 심하다."

  나는 쓴웃음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그 예언으로부터 기묘하도록 달콤한 감상적인 매혹과 탐닉을 얻었다.(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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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스 여차장에 대해 제법 육감적인 말투가 가능했던 것은 실로 단순한 이유에 지나지 않고, 바로 그 한 가지밖에는 내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 그것은 참으로 단순한 이유, 내가 여자에 관해서는 다른 소년이 갖고 있을 법한 선천적인 수치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뿐이었다.(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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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었다. 나 이외의 소년들이 밤이면 밤마다 꾸는 꿈을, 어제 길모퉁이에서 얼핏 본 여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나체가 되어 걸어다닌다는 것을. 소년들의 꿈에 여자의 젖무덤이 밤바다로부터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파리처럼 수도 없이 떠오른다는 것을. 여자들의 소중한 부분이 그 젖은 입술을 벌리고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끝도 없이 시레에누의 노래를 불러댄다는 것을.…… 게을러서? 혹시 천성이 게을러서일까? 이런 나의 의문,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근면함은 모두 그 의문에서 왔다. 나의 근면함은 마지막에는 그 게으름의 변호에 소비되고, 그 게으름을 게으름인 채로 유지해 두기위한 안전보장에 부쳐졌다.(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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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사랑과 성욕이 어떤 식으로 관련이 있는 것인지, 바로 그 점을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오우미가 내게 준 악마적인 매혹을, 물론 그즈음의 나는 사랑이라는 말로 설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만나는 소녀에 대한 자신의 희미한 감정을 이게 사랑이라는 걸까, 생각해 보는 내가 <동시에> 머리에 번쩍번쩍 광을 낸 젊고 촌스런 버스 운전사에게도 끌리던 것이었다. 무지가 내게 모순의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운전사의 젊은 옆 얼굴을 보는 나의 시선에는 뭔가 피하기 힘들고 숨 쉬기조차 힘든, 괴로운 압력과도 같은 것이 있었고, 빈혈질의 여학생을 흘끔흘끔 보는 눈에는 어딘가 부러 그러는 듯한 인공적인, 그래서 지치기 쉬운 데가 있었다. 이 두 가지 눈길의 관련을 알지 못한 채, 두 개의 시선은 나의 내부에 태연하게 동거하고, 망설임 없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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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느꼈다. 그렇지 않은가. 여행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만큼 우리들이 여행을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소유하는 때는 없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그저 이 소유를 부수는 작업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여행이라는, 저 완벽한 헛소동인 것이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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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연기>가 나를 이루는 조직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이미 연기가 아니었다. 자신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위장하는 의식이 내 안에 있는 본래의 정상성까지도 침식하여, 그것이 위장된 정상성일 뿐이라고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가짜밖에는 믿지 않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었다.……이러다가 나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마저 불가능한 인간이 될지도 몰랐다.(12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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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을 느끼지 않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냉혹한 모습을 띠더라도 마음이 냉정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태하고 미적지근한 정신이 드러낸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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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고통이라는 것은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폐결핵과도 같아서 자각 증상이 일어날 때는 이미 병을 다스리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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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벽성이란 욕망의 명령에 의한 일종의 방자함이다.

내가 가진 본래의 욕망은 그런 정면 돌파의 방자함마저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기만 한 욕망이었다. 그런가 하면 내 가상의 욕망 ― 즉 여자에 대한 단순하고도 추상적인 호기심 ― 은 거의 방자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냉담한 자유를 부여받고 있었다. 호기심에는 도덕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부덕한 욕망인지도 모른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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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르리라. 무감각이라는 게 강렬한 아픔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전신이 강렬한 아픔으로, 게다가 전혀 느낄 수 없는 아픔으로 마비되는 것 같았다.(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