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북쪽 거실》, 문학과지성사, 2009.

시월의숲 2009. 12. 21. 18:52

네가 그곳에 있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과, 네가 그곳에 있고 내가 외국에 머문다는 사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그것이 파생시킬 수도 있는 온갖 가능한 가상의 거리들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일시적인 결론은 편지, 편지를 쓸 수 있으며, 내가 외국에 있으면 너에게 더욱 많은 편지를 쓸 수 있으리라는 것, 그렇게 되리라는 것,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너에게 더 많은 것을 편지로 얘기해줄 수가 있으며 내 안에서 더 많은 편지들이, 편지들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억누를 수 없는, 지나가는 순간들까지도. 오직 찰나의 기억만을 허용하고 사라져가는 순간들까지도. 우리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결코 너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할 수 없었을 그런 순간들을.(19)

 

 

*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을 형상화하여, 그로 인해 무한대의 '' 중의 하나의 ''''라고 지칭함으로써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보인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가시적인 ''만이 내 안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순간을 형상화하여 그로 인해 무한대의 사물 중의 하나의 사물을 '그것'이라고 부름으로써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보인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가시적인 사물만이 세계 안에서 살아남을 것이다.(33~34)

 

 

*

 

 

이제 주인공의 이름을 정해야 해요. 린이 말했다. 난 반드시 이름을 알아야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비로소 생각해낼 수가 있단 말이에요. 이름을 모르면 그 사람의 상을 떠올릴 수가 없어요.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과 마라라고 불리는 여인은 둘다 동시에 입을 열더라도 필연적으로 다른 말을 하게 되어 있다고 믿어요. 운명은 그들을, 그들의 언어까지도, 다른 방식으로 다룰테지요. 마리와 마라의 방식으로. 일생 동안 그들을 향했던 이름부름의 소리가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규정할 테니까요. 난 그렇게 믿어요. 장미가 장미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장미는 켤코 장미로서 아름다울 수가 없을 거예요. 다른 존재로서의 아름다움만 가지게 될 뿐이죠. 그건 차이가 크답니다.(60~61)

 

 

*

 

 

자유란 수용소에서 부르는 노래에 지나지 않아요. 12미터 높이의 담장 안쪽에 자신을 스스로 가둘 줄 아는 자만이 자유를 노래할 줄도 아는 거죠.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자유롭지 않음을 담장을 통해서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담장 너머의 자유는 그 어휘의 본질상 개념의 경계가 없이 무한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다보면, 자유롭지 않음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우주와 시간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듯이 자유의 성질에 관해서 생각해야 해요. 누가 자유를 원하지 않을 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자유란 어떤 아집과 획일성의 결과, 눈에 들어오는 세계에 대한 집착, 개인적인 언어로만 표현되는 세계의 패쇄적 진술, 불분명한 모든 것을 편리상 뭉뚱거리는 이름, 언어 저편에 있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념의 집단 대리자,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것을 지칭할 때 쓰는 저급하고도 회피적인 어휘에 불과하고, 나는 그런 자유의 완벽한 바깥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그리워하는 자유로부터의, 자유로의 추방자, 자유 수용소의 수감자예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철새도, 죽은 영혼도, 모든 중량에서 해방된 마음도 마찬가지로 전부 자유롭지 않아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 조건을 규정하지 않으면 자유라는 단어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데, 그 조건은 본질상 끝이 없으므로,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의 제약 조건들을 생성해내고 발견하고 창조하고 낳고 있으므로, 유한하고 패쇄적인 이 세상의 언어 차원에서 본다면 자유라는 개념은 자체 오류예요. 우리의 자유는 조건 앞에서 늙어 죽어간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자유라는 단어의 오류성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직도 널리 통용되고 흔하게 말해진다는 점은 놀라워요.(68~69)

 

 

*

 

 

만일 네가 네 환상을 기록한다면,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네가 꿈으로 꾸는 묘사 불가능한 것들을 기록한다면, 그런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네 언어를 만들어낸다면, 하루하루 네 꿈을 기록한 노트를 당나귀처럼 어디든 짊어지고 다닌다면, 너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들과 안과 겉처럼 다를 수가 있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 성장하고 우거질 것이며, 그래서 너만이 산책할 수 있는 검은 숲을 이루게 될 거야. , 나는 바란다. 네가 숲이 무엇인지 알기를……(119)

 

 

*

 

 

우리는 꿈을 해독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그 편지를 읽고 내가 곁에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읽고 그렇게 듣는 것으로 너무나 충분하겠죠.(194)

 

 

*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치명적으로 선명하지 않다면, 지금 이 말을 머리에 떠올리는 우리들 자신이 분명히 삶의 영토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은 누구인가.(202)

 

 

*

 

 

고개를 들고 있으면 세계는 익숙하고, 사방의 사물과 얼굴 들은 형체를 그토록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일 없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듯하나, 그러나 시간의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사실 이처럼 어지러운 빠른 굉음과 시커먼 기름 덩이, 육중한 쇠절굿공이들이 만들어내는 기계의 거친 물살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으로 돌진하는 미친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인데, 단지 그 위압적인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그래서 구름이 저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으며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하루는 다른 하루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뿐. 그러한 어느 몽상의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의 기차가 우리의 몸 위로 지나가리라. , 하는 순간의 속도로.(224)

 

 

*

 

 

우리는 꿈의 해안으로 흘러가는데, 꿈은 투명한 경계를 활짝 열고 우리를 타인의 꿈속으로, 꿈속의 상상으로, 타인이 꾸는 우리의 꿈속으로 인도해버리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 발견하게 되는, 스스로를 설득할 만큼의 논리적인 근거란, 오직 우리의 몸을 휘감고 있는 무거운 이불자락뿐. 그래서 생각하게 되죠. 악몽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자리에서 그다지 멀리 떠내려가지는 못했구나. 그러나 우리는 종종 오직 그것에 의존하지요. 어느 날인가는, 이곳에 잠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아주 먼 곳으로, 우리들이 오래전에 망각한 장면들 속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리라는 미약한 기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 이전에 거대한 망각이 존재했으리라는 믿음과 기대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잠이 드는 이유는, 삶이 제한시켜놓은 것에 대한 그런 기대 때문일지도 몰라요.(24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