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이승우, 《오래된 일기》, 창비, 2008.

시월의숲 2010. 1. 2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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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엉겹결에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소설을 쓰면서 살 결심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당선 통지를 받은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한 권의 일기장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됐다.' 그러나 여전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곧 알아차렸다. 일기장에 씌어지기를 원하는 것들이 더 있었다. 어떤 것들은 되풀이해서 씌어지기를 원했다. 되풀이해서, 그러나 다르게. 역설이지만, 일기장을 가졌으므로 더욱 일기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일기장이 제공하는 자유는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을 담보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묶임을 조건으로 하나 해방, 해방의 지속을 위한 묶임이었다. 해방되었으므로 묶여야 했고, 해방을 반복적으로 얻어내야 했으므로 반복적으로 묶여야 했다. 어느 순간 그것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다.(28~29쪽)

 

- 「오래된 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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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내부의 골방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조선시대의 문맹의 숫자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세상의 현란한 불빛 속으로 차마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검고 어두운 구멍과 같은 공허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불쌍한 영혼들 말이야.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소통을 원하면서 그 욕망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 서툴다는 것이 또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야. 그들은 공개되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자신들의 고립과 공허가 선전되지 않는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고립과 공허가 해소되기를 바라지. 그들은 소통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물론 외톨이라는 사실조차 들키고 싶지 않아하거든."(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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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꺼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지표면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128쪽)

 

- 「전기수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