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시월의숲 2010. 2. 8. 15:50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81쪽)

 

-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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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거대한 도시에 사는 한, 하루에 두 번씩 평생 택시를 탄다고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같은 택시를 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과 다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강하고도 그만큼 멍청한 확신 사이를 한없이 오가면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에서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시시각각 변하는, 그러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얼굴을 지녔지만, 결국 단 하나일 수 밖에 없는 얼굴들. 그와 비슷하게 이 도시에서는 깊은 밤의 퇴근길 한강을 따라가면서 지친 얼굴로 바라보는 밤의 또렷한 풍경과 멀리 내몽고의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먼지로 뿌옇게 뒤덮인 낮의 풍경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맞이하는 하루 1440개의 순간들은 모두 똑같이 아름다웠다. 60초든, 1,000분의 1초든, 모든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청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107~108쪽)

 

-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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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망각은 불완전한 기능입니다. 완전히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인간은 불완전해졌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180~181쪽)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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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완벽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 고쳐질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228쪽)

 

-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