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시월의숲 2010. 12. 19. 18:28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할까.

 

한강의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 나서 한없이 망설이는 마음과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홀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음을. 그 공허와 안타까움, 절망과 뒤늦은 깨달음을 온전히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언어로서 그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표현된 것들이 결국 자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느꼈던 것들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밀려오는 안타까움에 몸을 떨어야 하리라.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꽃에 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나방들처럼 종국에는 후회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완전한 언어로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역시 불완전한 존재들. 하지만 그렇듯 미완의 존재들이기에 또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가갈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깨닫고 있지 않았던가.

 

추리소설처럼 미스테리한 분위기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인 정희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인주와 그녀의 삼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화가인 인주는 눈이 많이 오는 날 밤, 미시령 고개를 넘다가 사고로 죽게 되고, 그녀의 평전을 쓰고자 하는 강석원이란 자는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몰고가고, 이에 분노한 정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인주의 죽음에 관해서 그것이 자살이 아니었음을, 그녀는 결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할 사람이 아님을 밝히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 하나씩 알게 되는 인주에 관한, 인주의 어머니와 삼촌에 관한, 결국 자기 자신에 관한 자신도 몰랐던 이야기들. 소설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주나, 인주의 삼촌, 화자인 정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랑과 함께 모든 불행이 발생한 지점, 가장 격렬한 통증의 기원이었던 인주의 어머니.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자 아픔이 가장 생생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바로 인주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불행을 그 몸에 씨앗처럼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 거친 바람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차가운 벌판에서 어떻게든 견뎌내고자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결국은 사랑이었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 알면서도 외면해야 했던 사랑, 사랑이라 믿었지만 사랑이 아니었던 사랑, 사랑, 사랑... 개인의 모든 불행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 타오르는 불꽃에 제 몸을 던져넣을 수 밖에 없게 하는 그것.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그것. 인주가 미시령의 하안 불꽃 속으로 제 몸을 던져넣을 수 밖에 없었던 그것.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 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385~38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고 있고 바람에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