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정이현, 『너는 모른다』, 문학동네, 2009.

시월의숲 2010. 6. 13. 23:29

 

 

 

우리는 정영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연수의 말처럼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해라는 말 속에는 사실 터무니없는 위선과 거대한 무지가 들어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한 위선과 무지를 우리는 이해라는 달콤한 말로 포장한 채 짐짓 점잖은 척,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것을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하지만 그런 이해란 어쩌면 포기에서 나오는 체념 혹은 지독한 무관심보다는 더 나은 것인지 모른다. 위선과 무지로나마 어쨌든 상대와 대화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너를 이해해, 라는 말이 실은 난 너를 오해하고 있어, 라는 말과 같을지라도,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든 관심없다, 는 말보다는 어쨌든 좀 더 발전적이니까. 두 경우 모두 암울하긴 마찬가지지만.

 

정이현의 최근 소설 <너는 모른다>에서는 이런 '이해라는 이름의 오해'조차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각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그들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란 직함의 김상호는 중국을 무대로 무역업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가족들은 알지 못하고, 어머니란 직함의 진옥영은 화교로서 김상호와 결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옛 연인이었던 왕명이라는 남자를 만나러 수시로 대만을 들락거리고, 전처 자식인 큰딸 김은성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아들 김혜성은 의과대학에 들어 갔으나 대학에 나가지 않고, 거짓으로 등록금을 가져다 쓰면서 가끔씩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자동차 방화를 저지른다. 그리고 새엄마(진옥영)의 딸, 배다른 동생인 유지는 친구도 없고(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바이올린을 켤 때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들의 소통불가능을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거론하는 것은 내가 이미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사회적인 기대나 요구를 가지고서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일까?

 

가족인데 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가. 이 말은 가족이면 으레 그들의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는가? 김상호의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 각자의 비밀을 꼭꼭 숨긴 채 자신들의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대놓고 헐뜯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어느 집보다 평온해 보이지만, 그 내면은 사막보다 더 황량하다. 그런 그들에게 작은 딸인 유지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진옥영의 정부인 왕명이 소설 끝까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유지 때문이다). 그때부터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가 궁금해하면서 소설을 읽어나갈테지만 사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범인이 아나다. 유지가 집을 나갈 수 밖에 없었던(납치가 아니라) 이유와 김상호가 경찰에 바로 연락하지 않고 사설 탐정을 고용해서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던 이유, 진옥영이 왕명과 헤어지지 못하고 계속 만났던 이유, 김은성이 남자에게 집착하는 이유, 김혜성이 방화를 저지르는 이유... 그들 각자가 가진, 일그러졌다면 일그러졌을 이유의 동기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저 가족이니까 가져야 할 의무적 유대감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라는 이름의 오해조차 하지 않았던 그들 각자의 고독한 삶의 방식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먼저 사랑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닐까?

 

가족이라는 보호막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치명적인 고독, 이해불가능성을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의 유대와 사랑으로(아이러니하게도!) 극복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유지로 인해 조금이나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 가족이라는 끈끈한 유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이 가진 각자의 이해불능의 고독을 그들은 조금이나마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게 되었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그 물음에 약간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사실 그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그만큼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 또한 인간. 작가도 말했듯 등장인물들이 '마지막 문장 너머의 그곳에서도 그들의 생을 충실히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 우리는 다만 그렇게 간절히 바랄 수 있을 뿐. 그리고 우선 나는 너를 모른다고, 그러니 너도 나를 모를 것이라고 말할 것. 그토록 가까이 있었음에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너무나 모르고 있었음을 인정할 것. 시작은 거기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