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시월의숲 2011. 8. 2. 23:56

 

 

 

빗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태풍이 북상한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이 비는 태풍의 전조인 것일까. 덕분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낮동안 쌓였던 더위와 피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워더링 하이츠에서 히스클리프가 들었을 빗소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물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워더링 하이츠는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빗소리와는 비교되 안될 수십, 아니 수천 배의 황량함과 어두움을 지닌 거친 폭풍우가 몰아쳤을법한 저택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워더링 하이츠에서 벌어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증오, 복수 따위의 끓어오르는 감정에 비할바는 못되었을 것이다.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히스클리프의 격정에 찬 사랑과 증오와 복수는 그래서 더 처절하고, 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소설은 화자(진정한 화자는 가정부인 엘렌이다)가 자신이 세를 든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스클리프를 만나러 워더링 하이츠로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황량한 벌판에 홀로 솟아 있는 낡은 저택인 워더링 하이츠와 그 저택과 꼭 닮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주인 히스클리프. 저택에서 일하는 조셉과 헤어튼, 그리고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 그는 그들의 어색하고도 불편한 관계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의 부딪침을 느끼고는, 자신이 세 든 집으로 돌아와 가정부 엘렌에게 히스클리프를 비롯한 워더링 하이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해달라고 한다. 엘렌은 히스클리프가 처음에 워더링 하이츠로 오게 된 사연부터 그에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엘렌이 그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엘렌의 입을 통해 워더링 하이츠와 히스클리프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사람은 바로 화자인 가정부 엘렌이다. 오로지 그녀만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친절, 마음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따스함을 가지고 있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히스클리프나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캐서린과 이사벨, 폭력의 화신인 힌들리 언쇼, 그 중에서도 이성적인듯 보이지만 실은 심약하기 그지 없는 에드거 린튼 같은 인물들 속에서 그녀 혼자만이 고요히 촛불을 밝히고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소설적 결함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인물은,  다름아닌 에밀리 브론테 자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풍의 언덕에서의 그 모든 격정과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 그건 응당 에밀리 브론테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엘렌이라는 인물을 통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주인공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충고 또한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녀는 어디까지나 제삼자에 불과할 뿐. 더이상의 주제넘은 참견은 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야만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 경계선은 모호하기 그지 없지만, 이성의 세례를 받은 자라도 워더링 하이츠 같은 곳에 살게 된다면 격정에 휘말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해 정신이 나가거나 가슴이 터지지 않을까? 히스클리프는 그야말로 워더링 하이츠 그 자체이며 폭풍우 그 자체이다. 때론 그가 야비한 악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과를 포용하지 못했으며, 결국 이해받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이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지만, 폭풍우의 속성이 그렇듯 그것은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한 것으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감정의 폭발 같은 것이었다. 아, 사랑이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것이던가?

 

불 같이 끓어오르는 사랑과, 차갑게 식어 얼음이 되어버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주 원초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 폭풍우를 온 몸으로 맞으며 걸어오는 사람이 저기 보인다. 두 눈은 알 수 없는 증오로 번득이고, 가슴 저 깊은 곳에는 뜨거운 용암으로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