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까치, 1985.

시월의숲 2010. 10. 27. 00:39

 

 

책 어디를 펼치더라도 그곳에는 침묵이 흘러넘친다.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첫 문장을 읽으면서부터 빠져들게 되는 침묵의 세계는 그저 경이롭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작가가 가진 침묵에 관한 확신에 찬 신념과 그에 따르는 어조는 침묵이 단순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것, 모든 사물의 바탕이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 그 존재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오직 말로써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침묵이기에 그것이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는 대목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침묵은 태초로부터 존재했고 인간은 그런 침묵의 세례 속에서 침묵과 함께, 침묵을 바탕으로, 침묵에 근거하여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침묵이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씌여졌다고 한다). 인간은 점차 침묵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왔고 그 결과 인간은 신경질적이고 배타적이 되었으며 급기야는 한없는 우울 속에서 절망하며 자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침묵은, 소음과 잡음이 들끓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저 강물처럼 우리네 삶 깊숙히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침묵의 세계를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참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침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지만 말이라는 것도 침묵을 바탕으로 했을 때, 침묵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야말로 진정한 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런 의문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니까 침묵을 바탕으로 한 말이라는 것은, 말 자체에 침묵이 들어있는, 침묵과 결합되어 말을 함과 동시에 침묵도 파생되어 나오는 그래서 사랑과 행복, 열정같은 온갖 긍정적인 것들의 기운을 품고 있는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 자연 속에서 침묵은 그야말로 존재의 빛을 발한다. 자연 속의 모든 것들에 침묵이 깃들어 있다. 침묵 속에서 자연이 하는 말들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발을 씻어주리라. 진정한 소통은 침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