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서울의 낮은 언덕들』, 자음과모음, 2011.

시월의숲 2012. 6. 16. 20:40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보지 않은 나로서는 외국의 낯선 풍경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건물의 벽돌색 혹은 이름모를 나무의 이파리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느낌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쩌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느낄 수 있는 낯선 느낌을 통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유추해 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은 여전히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질감과 그곳의 공기와 공기속에 떠도는 특유의 냄새를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수아의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읽다보면 마치 그곳에 가보지 않아도 나는 그곳을 거닐고 있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꿀과 버터를 바른 빵을 먹고 있는 듯 느껴진다. 그 도시의 이름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곳은 베를린이기도 하고, 동아시아의 어느 도시이기도 하면서 서울의 어느 골목이기도 하니까. 그곳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도시에도 스타벅스가 있고, 생활에 찌든 주름진 노파와 싸구려 시계를 파는 동양인들,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이 있다. 주인공인 '경희'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름이 있을 것이나 그 또한(도시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듯)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그곳에서의 이국성은 그리 낯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규정하는 어떤 표지 혹은 정체성이 된다. 낯선 익숙함 혹은 익숙한 낯섦이랄까. 그것은 도시들간의 어떤 이질성에 주목하기보다 그 속에서 방황하고, 서성이는 존재들의 어쩔 수 없는 삶과 죽음에 우선 주목했기 때문이리라. 이건 너무 거창한 말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작가에게 여행이란 '그 무엇보다도, 하나의 작업실에서 다른 작업실로의 이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니, 불과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것은 여행이라는 것이 다른 중요한 이유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전제에서 촉발된 습관적인 고정관념의 산물이며, 그러한 주된 이유 외의 다른 이유는 모두 중요하지 않고, 하찮을 것이라는 위험한 짐작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업실에서 다른 작업실로의 이동'은 곧 작가에게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의 '여행'이었으며 그것이 최초에 이 소설을 쓰게된 열망의 씨앗이었으므로.

 

소설의 주인공인 '경희'(과연 그녀가 주인공이기는 한걸까? 아니, 주인공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기는 한걸까?)는 한 때 낭송극 전문 무대 배우였으며 지금은 자신의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서 그에게로 가겠다는, 걸어서 국경을 넘고 대륙을 횡단하리라는 비현실적인(그것이 비현실적인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걸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며, 마음과 육체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묘사'라고.) 결심을 한다. 베를린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경희는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반치,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마리아가 아닌, 그러나 그가 마리아라고 불리운데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마리아들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경희는 사라지고, 소설은 그 자체로 낭속극이 되고, 경희를 찾는 '나'는 경희가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희 자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말하며,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며, 결국 '나'는 스스로 낮은 언덕의 루핀이 되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너' 혹은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生)과 다를 바가 없어지며, 존재는 서로 중첩되고 국경은 무너지며 이 도시와 저 도시는 하나가 된다. 소설 속 등장하는 세계 각지의 '카라코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와 인종, 피부색과 성별과 노소,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도시를 순례 혹은 방황하는 존재들의 쉼터가 바로 '카라코룸'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이상향이자 정체성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낮은 언덕의 루핀이 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전세계에 존재하는 카라코룸이 된다는 말과 같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들. 정신없이 혼란스럽고, 이야기는 있으나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으며, 혹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분절된 목소리(소설의 맨 마지막 작가의 글에서 밝힌대로)'만이 서로 교차하는듯한 이 소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한가? 혹은 목소리? 목소리를 닮아가려는 문학적인 작업?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것은 분명 배수아라는 작가의 글이라는 것. 그가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소설은 그의 음색 그의 목소리의 현현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있어 현기증나며 때론 아름답고 낯설게 보이는 언어를 이렇듯 유려하게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설은 그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놀랍고도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지문이 어느 소설보다 확실히 찍혀있는 소설이다. 이것은 도시를 배경으로 태어난 자의 고백록이자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정체성인 자의 방황록이며, 점차 경계가 사라지고 너와 나의 존재가 흐릿하게 겹쳐지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매력적인 변명이자 어떤 징후의 기록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의 목소리로 존재할 것이며, 지금 이곳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도시에 동시에 존재할 것이며, 그것의 이름, 누구의 부모, 자식 따위의 것들과는 별 상관없이 존재하게 될 것이며,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도 하다. 이미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고, 미래의 어느 순간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진정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경희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독일어 선생의 소식을 듣고 충동적으로 걸어서 여행할 것을 결심했으나 결국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결심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미 예감하고 있는 종류의 것일지 모르며, 그리하여 아무도, 급기야는 죽음조차 말해주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