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시월의숲 2012. 4. 1. 21:51

 

 

 

무언가를 잃어가는 사람들, 점차 몰락해가는 사람들, 자신의 몰락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인식하는 사람들이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가 생겨나게 될까? 그들의 만남은 더 깊은 몰락에로 가는 길이 될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 그 몰락은 여자에게는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었고, 남자에게는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진부한 스토리대로 간다면 그건 여자에게는 목소리를, 남자에게는 눈을 되찾아주는 것이 되거나,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여자는 남자의 눈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자칫 진부해지기 쉽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내느냐가 소설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이렇듯 예상가능한 이야기를 비교적 덜 진부하게, 덜 신파적으로, 하지만 진지하게 밀어붙인다. 한강의 소설들에서 보이는 어떤 절실함이나 아픔은 그의 전작인 <검은 사슴>이나 <그대의 차가운 손>에, 탐미주의적인 시선이나 파격적인 면은 <채식주의자>에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주인공들을 대하는 시선은 좀 더 성숙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소설을 품격있고 아름답게 만든다.

 

시력을 잃어가거나 목소리를 잃어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려야 하고, 목소리로 나타내지 못하는 감정을 발설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작가는 좀 더 신중해지고, 내면으로 더 깊어지며,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파고들어가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는 장소가 하필이면 희랍어 강의실에서라니. 이토록 절묘한 설정이 또 있을까? 이미 죽은 언어인 희랍어를 가르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과의 만남. 거기서 희랍어는 더이상 죽은 언어가 아니며,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상징적이고 근원적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쉬 사랑이라 표현할 수 없으리라(사랑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얼마나 진부한가!). 그래, 책 뒷편에 실린 말처럼,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라고만 해두자. 정말이지 이 소설은 그 찰나의 순간만을 기록한다(갑자기 날아들어온 새로 인해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면이나, 남자와 여자가 처음으로 손바닥으로 대화를 하는 장면을 보라). 그 이후의 이야기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다만 마지막에 3인칭으로만 서술되던 여자의 시점이 1인칭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그리 비극적이지만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한강의 소설 속 여인들이 지닌, 예민함 속에 담겨 있는 어쩔 수 없는 광기를 사랑한다. 그것은 독자를 매우 불편하게도, 힘들게도 하지만 그것을 읽고 난 후 밀려오는 독특한 카타르시스에 나는 언제나 매료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이상하고, 폭압적이며 힘겨운 정신병동 혹은 감옥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소설 속 여자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녀가 바로 정신병동에 가야할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예민한 주인공의 세계와 주인공을 제외한 보통 사람들의 세계 사이의 화해는 정영 불가능한 것인가? 이 물음에 <희랍어 시간>은 보다 긍정적인 대답 쪽에 기울어져 있는것 같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174쪽).

 

침묵과 문장들은 그렇게 우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깊은 침묵에 뿌리를 둔 말과 짙은 어둠에 뿌리를 둔 빛이 만나 한 순간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닐까. '아름답고 온전한 몰락'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순간, 작가의 끊어질듯 이어지는 목소리, 마치 작고 나즈막한 새의 울음소리 같은 그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