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문학과지성사, 2013.

시월의숲 2013. 7. 29. 19:05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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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각의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기를 그동안 얼마나 갈망하고 또 갈망했던가. 아, 잠이여, 네가 영원하기만 하다면. 여기서 눈을 감고, 잠 너머에 있는 온전한 무(無)의 세상, 내 존재마저도 소멸시켜버리는 세상으로 서서히 건너갈 수만 있다면! 내 존재 전체가 잉크 얼룩 한 점, 선율 하나, 영롱한 무지갯빛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 파도가, 이 형체들이 영원으로 뻗어나가 마침내 서서히 희박해지며 꺼져버리고 사라져버리는 순간, 그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토록 염원하는 그리움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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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미래, 시간, 하루, 한 달, 한 해, 모든 것이 내게는 구별할 수 없이 같을 뿐이다. 인생의 여러 단계, 어린 시절과 노년의 구분은 헛된 말장난이다. 그런 구분과 개념은 평범하고 하찮은 인간들에게나 중요한 것이다. 천한 인간일수록 생을 마치 계절처럼 단계별로 나누며, 확연한 구분 아래 경계 짓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 단계에 걸맞은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내 일생은 오직 하나의 계절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기후뿐이다. 끝없는 암흑의 천지 한가운데, 냉기가 뼈를 파고드는 얼어붙은 땅이 그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나는 양초처럼 스스로의 불길 안에서 타 녹아버린다.(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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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력과 사고는 현생의 무게를 벗어던졌다. 나는 침묵의 우주로 들어갔으며, 밤나방의 금빛 날개에 올라타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텅 빈, 희미한 빛의 세계를 관통하여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편의 효력은 깊고도 압도적이어서 모든 종류의 쾌락과 환희가 내 안에서 용솟음쳤으며,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그런 황홀감을 따라오지 못할 것처럼 여겨졌다.(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