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마음산책, 2007.

시월의숲 2015. 6. 1. 20:28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9쪽)


위 첫 두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에밀 아자르, 즉 로맹 가리의 <가면의 생>은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인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찰이라는 표현이 좀 얌전하고 고상하게 들리거나, 인간이라는 말이 꽤나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소설 속 주인공이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버리면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소설은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어쩌면 에밀 아자르의 또다른 자아가 남는 종이에 휘갈겨놓은 메모 같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에 대한 고찰로 건너갈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에밀 아자르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수 있다, 고.


나는 이 소설에서 격렬하고도 신경질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어떤 정신적 몸부림의 흔적을 읽는다. 스스로를 비단뱀으로, 독재자 이디 아민이나 피노체트 혹은 이란의 왕으로 생각하는 주인공이 코펜하겐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티안센 박사와 통통 마쿠트(삼촌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체가 심히 의심스러운) 등과 만나며 대화하는 것이 전부인 소설. 모든 것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망상으로만 기록된 소설. 무엇이 실제인지 무엇이 헛소리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서술방식.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이 에밀 아자르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자기 앞의 생>으로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어리둥절함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부터 그랬으니까.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글을 쓰는 행위도 그 한 가지 방편이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여러가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듯, 이 소설의 주인공 또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소설 속에 등장한다. 그는 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고자 했을까? 왜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어쩌면 도미니크 보나가 쓴 로맹 가리 전기를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그 책을 읽을 수 없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일단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는다. 그런 이후에 남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격렬하고도 신경질적이며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에밀 아자르 자신의 정신적 몸부림의 흔적이다. 일단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는 그것에 천천히 손을 대본다. 음미한다. 귀를 기울인다.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이렇듯 혼란스러운 가면이라면 어찌 가만히 쓰고 있을 수 있을까. 계속 가면을 바꿔 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급기야는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혼란스러움의 반영이자, 어쩌면 에밀 아자르가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자신의 내면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자기 앞의 생>을 쓴 작가의 것이라고 어떻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어쩌면 무척 슬픈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책의 마지막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요?"

"계속해서 글을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