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시월의숲 2015. 5. 7. 23:17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자신이 찾아낸(혹은 만들어낸) 길을 사려 깊게 안내해주는 사람을 따라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시나 소설에 대한 평론집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금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걱정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것은 읽어본 적 없는 시나 소설에 관한 평론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장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기우에 불과함을, 첫 장을 읽자마자 깨달았다. 이 책은 물론 영화에 관한 책이지만, 결국 문학에 관한 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 관한 문학적 성찰'이라고 해야할까. 그 부분은 저자 자신도 책의 머릿말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자신은 영화를 보고 영화적인 것을 말하기보다는 문학(서사)적인 것, 즉 '좋은 이야기'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하여 탄생한 (부록을 제외한) 스무 편의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의 하나가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고백을 읽으면서는 이 책 자체가 그의 '정확한 사랑'의 산물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화들 중 나는 고작 네 편의 영화만을 보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처럼 생각되었고, 다시금 그것을 보고자 하는 열망(심지어 이미 본 영화조차도)이 생겼다(이것은 신형철의 다른 책을 읽어도 똑같이 나타나는 증상인데,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평론이면 평론, 그가 언급하는 모든 문학작품을 읽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성공했다는 뜻이리라. 모든 글들이 다 정확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탄생했겠지만(그래서 다 좋았지만), 그 중에서 표제작인, <로렌스 애니웨이>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고 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그 두 영화를 '정확하게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헌사'라고 했다. 나는 영화를 보지 않고도 그 말에 깊이 공명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영화와는 별개로 그 문장이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화두와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사랑받기 위해 삶과 타협하지 않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의 기쁨과 고통. 나는 늘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고민했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내가 나로 사는 것의 기쁨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타인을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정작 자신조차 고통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외부적인 고통은 적을지라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채 생을 연기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그는 그 두 영화를 삶과 타협하지 않고 '내가 나'로 살기 위한(정확히 사랑받기 위한) 영화라고 했다. 그럼 다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리라. 나는 내 삶에 최선을 다했는가? 내 삶에 떳떳한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변명 뒤에 숨어서 정작 자신이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비겁하게. 


정확하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과도 연결된다. '내가 나'이지 못하고, 내가 나를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느 누구를 정확하게(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정확하게 사랑받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어쩔 수 없이(의도치 않게) 가해지는 고통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타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고통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에서처럼, 어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삶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자신의 삶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이고, 성장은 고통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항상 옳은 것이 된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문학(읽고 쓰는 것)이며, 이미 다른 책에서 그것을 무덤덤하게 밝혔으나, 그가 그것을 굳이 밝히지 않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알 수 있다고 단호히 말하지 못한다) 같다. 그는 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하지만(그래서 늘 진실에 근접한 표현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보다는 정확하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과 삶에 대한 겸허한 고통의 흔적이 그의 글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제일 마지막에 쓴 문장을 조금 수정해서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비평가, 흥미로운 비평가, 정의로운 비평가 등등이 있고,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정확한 비평가다. 그런데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더 정확한 비평가'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글의 도입부에 적힌 그의 (정확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여기에 다시 한 번 더 옮기면서 이 글을 끝내려 한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