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팝나무의 계절

시월의숲 2015. 5. 10. 21:27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제법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기도 했으나, 기왕 나왔으니 조금이라도 걷자 싶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둔치 아래를 걸을까 했는데, 발걸음이 내가 사는 동네로 옮겨졌다. 내가 이곳에 온지도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건만, 나는 아직도 이 동네를 알지 못했다.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늘 다니던 길의 풍경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사는 사택을 기점으로 해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걷기로 했다. 이쪽으로 출발해서 저쪽으로 가면 한바퀴 빙 돌면서 동네를 구경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파트와 빌라가 제법 있었지만, 시내와는 좀 떨어져 있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전반적인 인상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일요일 오후라는 시간적인 요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고, 아파트 한켠에 설치된 그네에는 여자아이들이 메달려 그네를 타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초등학생을 보았으며, 노란 버스 두 대가 마을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낯설게 다가오는 풍경을 느끼면서 천천히 걸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언덕이 나왔고 그 옆으로 요양병원이 보였다. 이곳에 병원이 있었다니!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놀라움을 느끼며 병원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마치 요새처럼 산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병원 앞에는 정자같은 쉼터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병원복을 입은 노인들이 여러 명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매일이 일요일 오후 같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는 저들의 휴식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숨겨져 있던 새로운 장소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요양병원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지나, 냇가를 지나 다시 사택으로 돌아왔다. 산책 길에 이팝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벚꽃의 계절이 가고 바야흐로 이팝나무의 계절이 온 것이다. 하얀 꽃들이 뭉게뭉게 피어 있는 나무들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 기운에 이끌려 이팝나무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하얗게 핀 꽃무더기가 마치 이밥(쌀밥) 같다고 해서 이팝나무가 되었다지.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하얀 쌀밥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까이 들여다본 꽃은 오히려 긴 날개를 가진 나비 혹은 하루살이처럼 보였다. 하얗고 길며, 가녀린 날개를 가진 하루살이떼. 손으로 툭 건드리면 화르르 떼를 지어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내가 바람이 불어 이팝나무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모습은 벚꽃이 날리는 모습과는 달리, 마치 곤충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이팝나무의 계절이다. 그 다음은 아카시아의 계절이 될 것이다. 아카시아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 아니,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다. 나는 나의 계절을 잘 지내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계절을 너무나도 잘 아는 자의 선언이 아닐런지. 나의 계절은 무엇인가, 자꾸 묻고 싶어지는, 그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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