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시월의숲 2015. 6. 21. 00:35

 


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을 읽은 것은 순전히 배수아 때문이었다. 창비 팟캐스트에 나온 배수아가 번역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사회자 중 한 명(아마도 황정은이었던가?)이 배수아에게, 어떤 작품이 잘 된 번역인가,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번역의 이상(理想)에 가장 근접한 번역 혹은 번역가가 있는가, 라는 요지의 질문을 했다. 배수아는 조금 생각하더니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번역한 송의경을 들었다. 내가 이전에 파스칼 키냐르라고 하는 소설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팟캐스트에 나온 배수아로 인해 나는 이름도 생소한 프랑스 태생의 소설가를 새삼 알게 되었고, 급기야 <은밀한 생>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제발트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그의 소설을 읽게 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였는지 이전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배수아의 인터뷰가 실린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기사의 전문과 함께 배수아가 자신의 책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배수아의 책장은 언젠가 자신이 말했던 책장에 대한 모순된 열망으로 가득 차 보였는데, 소박하고 무표정하면서도 어떤 집요함과 고독함이 함께 느껴졌다. 그런데 거기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 정말 은밀한 모습으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내가 파스칼 키냐르를 읽게 된 사연이다. 하지만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었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란!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특유의 상상력이 빛나는 표현들을 읽을 때면 놀랍기도 했지만, 그의 독특한 사유와 문체는 대체로 갈피를 잡기 힘들었고,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키냐르의 다른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기까지, 앞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가라앉히고, 다른 소설을 받아들일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필요했다. 이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과정이었으리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작가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아침><은밀한 생> 사이의 시간은 커다란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이와 관련하여 책날개에 적힌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 파열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귀환한 뒤 키냐르의 글쓰기 방식은 큰 변화를 겪는데, 이때부터 소설··우화·민화·잠언 등 그 모든 장르가 뒤섞인 혹은 그 어떤 장르도 아닌 그저 '문학'을 추구한다." 그 이후에 나온 새로운 글쓰기의 첫 작품이 바로 <은밀한 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척점에 있는 두 소설을 읽고 나니 어떤 변화의 양상이 느껴졌다. 이러한 사실은 배수아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서사에서 비서사로의 변화, 서사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문학을 추구하는 자세 말이다. 그렇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물론 다르지만.

 

아직 <세상의 모든 아침>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말하기 위해 배수아를, 파스칼 키냐르를, <은밀한 생>을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소설에 나오는 비올라 다 감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이다. 첼로의 전신이라고만 알고 있던 비올라 다 감바 연주를 처음 들었던 때를 기억한다. 활을 켜는 자세와 악기를 다루는 모습, 첼로와는 사뭇 다른 음색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연주회에 다녀와서 블로그에 간단한 감상을 올렸는데, 찾아보니 그때가 벌써 재작년 겨울이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본 연주자의 모습과 연주자가 들고 있던 비올라 다 감바는 기억에 남는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단조로우면서도 이상스레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음을.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으면서 나는 그 연주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 보았던 비올라 다 감바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실존했던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와 그의 제자였던 마랭 마레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궁정 악단에 소속되어 이름을 떨친 마랭 마레의 스승으로만 알려진 생트 콜롱브란 인물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소설은 마치 비올라 다 감바의 연주를 듣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112)'는 책 속의 선언처럼, 세상의 모든 음악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음악은, 반복되어 연주할 수 있지만, 모든 연주는 일회성일 뿐, 그 어느 연주도 같지 않다. 생트 콜롱브는 타인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연주보다는 악기가 내는 소리에 천착했다. 그래서 그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부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그의 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올라 다 감바를 사랑했다. 부인은 죽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의 제자였던 마랭 마레와는 사랑과 음악 그 모든 면에서 달랐다. 마랭 마레는 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이 타인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 음악 자체의 추구에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음악으로 출세를 바랐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결국 스승의 예술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연주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생트 콜롱브가 그의 제자에게 말한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그렇게 끊임없이 근원을 찾아 자신을 태운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자신을 고독과 절망 속에 스스로 밀어 넣은 채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에만 빠져든 그 삶이. 그가 가진 삶의 기쁨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이 누구보다 더 숭고해 보인다는 사실은 쉽게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파스칼 키냐르는 생트 콜롱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75)

 

그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완성했다. 이런 당당한 선언 앞에서 행복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물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