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한강, 『흰』, 난다, 2016.

시월의숲 2016. 12. 5. 00:28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129쪽)




1. 두 개의 문장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두 명의 작가가 생각났다. 정확히 말해, 두 명의 작가가 각자 쓴 책의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하나는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이고, 또 하나는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이란 소설이었다. <가면의 생>에 나오는 구절은 이렇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올빼미의 없음>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생명이 가고, 그리하여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무덤을 딛고서 모든 젊은 아름다움과 신선하고 달콤한 환희가 활개치며 찾아온다면, 나는 향기로운 봄의 입술에 절대 찬미를 보내지 않겠다. 그 입술이 무엇을 빨아먹고 살이 올랐는지 먼저 생각하게 되리라.' 내가 떠올린 두 문장들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 또한 그 두 문장과 한강의 <흰>이라는 소설 사이에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들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리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그 문장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왜? 무엇 때문에?



2. 죽음


내가 생각한 두 문장과 이 소설과의 연결고리는 바로 죽음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늘 내 삶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형성된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내가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또한 자신의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자신이 과연 태어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지 두 시간만에 죽어버린, 아직 언어와 시각을 갖기 전의 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만약 당신이 살아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하고,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배내옷이 수의가 되어버린 언니 때문에, 기억나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그 기억 때문에 주인공은 늘 깊은 숨을 들이마셔야 했고, 뻐근한 명치를 쓰다듬기 위해 웅크린 어깨를 자꾸 펼쳐야 했다.



3. 삶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도시, 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더니, 폴란드의 바르샤바라고 나왔다. 작가가 실제로 머문 도시이기도 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머문 도시이자, 이국의 땅에서 언니를 생각나게 하는, '흰 도시'라고 명명한 그 도시가 바로 바르샤바였던 것이다. 주인공은 이 도시에 죽은 언니가 자기 대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도시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 후, 새로이 쌓아올린 건물들로 가득한 이 도시의 풍경이, 이미 한 차례 죽어버렸지만 결코 죽지 않고 자신 안에 살아있는 언니의 의지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죽은 언니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녀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죽지말라는 말로 이미 죽은 언니를 애도하고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 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것은 마치 죽음의 숨결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도 읽히지만, 반대로 죽어가는 자가 내뱉은 마지막 숨에 담긴 생의 의지를 이어받아 앞으로의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읽힌다.




4. 모든 흰


흰 것들은 삶과 죽음 모두를 담고 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모든 흰 것들이 있다. 그렇게 경계에 있는 것들을 한강은 '흰' 것에 담으려 했다. 이것은 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고, 소설 <희랍어 시간>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시와 소설의 경계에 서 있다. 그녀가 이 소설에서 담으려 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어쩌면 그녀는 형체 없이 사라지는 하얀 숨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안개, 연기, 구름 혹은 하얀 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러니 이 책을 시라고 부르든, 소설이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