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시월의숲 2017. 3. 3. 21:09

취향공동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걸 말한 사람은 요즘의 소비 트렌드에 대해서 말하면서 취향공동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주제는 생각나지 않는 어떤 강연에서였다. 프로젝터를 통해 보여 진 화면에 몇 개의 키워드가 나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수첩에다 받아 적었다. 나는 무슨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도 없지만, 특별히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는 어떤 면에서 공동체적인 삶(그런 게 있다면) 보다는 개별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동체라는 말에는 일종의 신비하면서도 주술적인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맥락 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말하리라.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서 공동체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우리는 개별자이기도 하지만, 그런 개별적인 존재들이 모여서 사회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원론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공동체란 무엇인가.

 

나는 최근에 나온 배수아의 신작 소설을 읽은 후 가장 먼저 그 말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의 첫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인 험윤의 아침 풍경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커피를 만드는데, 그 과정이 여느 커피 만드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주인공이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굉장히 세밀히 묘사하는데, 그것이 내겐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행위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희귀한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목욕하는 방식과 책을 읽는 방식 또한 남들과는 다른데, 그것이 주인공에게 독특한 매력을 부여한다. 그 매혹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읽고 느끼는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주인공의 하루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서사는 아주 기본적인 뼈대만 제공하는 배경으로 머물 뿐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커피를 내리는 방식, 아침을 먹는 방식, 조깅을 하는 모습, 책을 읽는 방식, 목욕을 하는 방식 등의 묘사이다. 어쩌면 굉장히 비타협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시종일관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비춰지는 것은, 그가 독립 영화감독으로써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어느 문화재단에서 후원하게 되었다는 소설의 내용과도 같이, 낯설지만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어떤 매혹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나 같은 사람 말이다.(내가 스스로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영국식 뒷마당> 또한 마찬가지다. 그 소설엔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페이지들을 읽는 경희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녀는 미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비밀 - 아무나 볼 수 없고 읽을 수도 없는 것을 보고 읽는 - 을 간직한 사람일 수도 있다. 화자인 에게 경희는 생애 최초의 금지된 여자였고, 경희를 통해서 비밀과 거짓말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채 집에 유폐된 경희는 주인공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나 결국에는 매혹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경희는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페이지들을 읽었는데, ‘가 최초로 알아들은 문장이 바로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였다. 그때의 심정을 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정체모를 어떤 매혹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경희의 곁에 주저앉았고, 홀린 듯이 그녀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녀가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마침내는, 믿을 수 없게도 그녀와 긴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그날 경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내 안에 아로새겨졌다. 내 안의 깜깜한 고대동굴에 최초의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고, 그을음과 재, 동물의 기름과 붉은 흙으로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를 남겼다. 나는 그것을 굳이 기억해 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그 자체로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나였다. 내 피부이자 감각이었다.(78~79)

 

이 고백은 소설 속 주인공의 고백이자 작가 자신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나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 고백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지 그렇지 않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만약 누군가 이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배수아를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배수아를 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취향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까. 배수아의 취향, 혹은 배수아를 읽는 취향 말이다. , 어쩌면 취향이란 말은 훅 불면 날아갈 듯 너무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는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이자 피부이자 감각인 강렬한 매혹을 단순히 그들의 취향이라고만 말한다면 어쩐지 너무나도 부주의하고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우나, 어떤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어쨌거나 배수아의 소설에는 언제나 그런 개별적인 매혹들로 가득했다. 때론 그것이 음악으로, 자유로, 여행으로, 죽음으로, 환상으로, 꿈으로 나타나 때론 혼란스럽기도 했지만(그조차 나에겐 매혹적이었다!) 이번에는 보다 명징하게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반갑다. 두 편의 소설밖에 실려 있지 않았지만(그래서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배수아의 어떤 소설보다도 매혹에의 황홀함(혹은 황홀하고 싶은 심정)이 잘 드러난(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블랙홀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는) 소설이 아닐까.(2017.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