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나만의 작은 숲을 위하여

시월의숲 2018. 3. 11. 22:02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실제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겨우 어두컴컴한 극장이냐고 누군가 힐난한다면, 뭐 어쩌겠는가, 지금의 나로선 그게 최선인데,라고 말할 수밖에.


언젠가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처음 그 영화를 제법 유명한 요리 유튜버의 영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만들던 토마토 스파게티를 그 유튜버가 따라서 만드는 영상이었다. 유튜브에는 그 영상 말고도 영화에 나오는 요리 장면들과 그것을 따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 영상들에 이상하게 빠져들었고 급기야는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는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으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 반면, 한국판은 요리가 영화 속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일본 버전은 실제로 요리를 따라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한다면, 한국 버전은 그저 혜원이 해주는 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달까? 아무튼 두 영화 모두 아름다웠고, 보는 내내 편안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두고 힐링 영화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속 농촌이 영화의 목적에 맞게 이루어진 인공의 세계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혜원이 요리를 할 때 적재적소에 놓여 있는 모든 사물들의 적확함에 어떤 편안함을 느꼈다. 수제비를 하기 위해 밀가루가 있고, 밭에는 배추와 양파, 토마토가 있으며,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누룩이 있고, 콩국수를 위해 콩국물이, 시루떡을 위한 팥과 시루가 혜원이 필요한 그 자리에 정확히 놓여 있는 것이다. 필요한 자리에 어김없이 놓여있는 것들에게서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혜원의 엄마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떠나고, 이후에도 줄곧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는 이유를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그녀는 아직 고등학생인 딸을 두고 집을 나가야만 했을까? 아무런 이유도 짐작하지 못한 채 혜원은 엄마가 사라진 후, 무언가 결여된 삶을,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얼핏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소설 속 이해하기 힘든 남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영화 속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혜원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리라. 소설은 시종일관 심해를 항해하듯 깊고 조금은 무겁게도 느껴졌지만(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영화는 오월의 햇살처럼 밝고 따스했다. 그러니까 영화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혼자가 되고, 언젠가 사람은 떠나고, 때론 돌아오기도 한다. 그 모든 떠남과 돌아옴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 돌연한 떠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어미새는 언젠가 새끼를 떠나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고아가 되듯이. 혜원의 방황은 우리 모두가 지닌 방황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혜원의 엄마가 혜원에게 썼던 편지글이 생각난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도 왜 시골을 떠나지 못했는지.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시골에서, 자연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크길 바랐다. 자연 속에 뿌리박고, 자연의 흙과 바람과 햇살을 자양분 삼아 앞으로의 삶을 헤쳐나가기를 바란 것이다. 예술에서는 좀 진부한 듯 하지만, 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것은, 자연은 치유의 숲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느끼기 위해 이 영화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치유 혹은 위로받기 위해서. 그리고 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봄을 생각했다. 혜원이 사계절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봄 앞에 섰듯이. 어쩌면 이 영화가 내겐 봄의 전령사가 아니겠는가, 하고. 오늘의 햇살은 바로 어제의 햇살과는 또 다른 따스함을 품고 있는 듯 느껴졌다. 혜원이 그러했듯, 나 또한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를. 나만의 작은 숲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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