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문학동네, 2006.

시월의숲 2019. 4. 14. 18:11



이 짧은 소설을 읽고 맨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였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이 나고 자랐던 땅에서 벗어나 스스로 망각 혹은 고독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정이 아닌가? 어떻게 인간이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고(혹은 점차 가지지 않게 되고), 이방의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다가 사라질 수 있을까. 그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도 그 사람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 고독하지 않은가. 너무나 고독해서 견딜 수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종교적인 사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들은 선교사들이므로 당연하게도 이방의 땅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요즘에도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내전으로 위험한 나라에 선교를 가서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너무나 쉽게 당도하지 않은가? 오래 전, 열강들이 마치 땅따먹기하듯 힘없는 나라를 점령하던 그 시기에, 프랑스에서 베트남까지 거의 일 년을 걸려야만 당도할 수 있는 그 시기에도(오히려 그런 시기였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선교사들은 낯선 땅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랜 여행의 휴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고, 목적지에 다다르더라도 열사병이나 풍토병으로 죽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들을 낯설고 위험한 땅으로 부르는 것일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미지의 땅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서 처음 그들이 가졌던 종교적 소명은 여행이 길어질수록, 낯선 땅에서 이방인의 말을 배우고, 이방인의 풍속을 배워갈수록 점차 희석되어 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 이 땅에 왔던 이유를 알 수 없어진다. 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수록 더욱 외로워지고, 고독해진다. 하지만 비극처럼 보이는 그들의 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희열감으로 충만해져 간다. 더욱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그들은 망각과 사라짐이라는 어떤 근원에 도달한 것일까? 종교나 정치, 문화 등 모든 인위적인 것들에서 벗어난?


소설을 다 읽고나면 어떤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슬픔은 이 책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처럼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이다. 그것은 흔히 느낄 수 없는 드문 감정이다. 그 이상한 감정이 소설 전반에 침묵처럼 스며들어 있고, 다 읽은 후에는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결국에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 다다랐다는 깨달음 때문에.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죽음'과 '망각'으로써. 그들은 절대고독의 세계 속에서 자유로웠으며(점차 자유로워졌으며) 스스로 잊혀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그것이 자신 안에 세계를, 세계 안에 자신을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비로소 그들은 세상의 일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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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작가 특유의 문체가 한 몫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화영 선생은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정말 정확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구성하는 각각의 문장들은 마치 이야기 속의 외롭고 행복한 수사 도미니크와 수녀 카트린처럼 고립되어 있다. 문장과 문장의 사이에는 망망대해와 건너지를 수 없는 침묵의 공간이 깊고 넓어진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섬처럼 고립된 문장들 사이에 깊고 넓어지는 침묵의 공간 속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자신의 적막한 존재를 비춰보고 있다는 것을 어느 한순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154~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