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시월의숲 2019. 6. 16. 21:33

 

예니 에르펜베크라고 하는 이름도 생소한 동독 작가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소설을 읽었다. 수없이 고백하곤 했지만, 이 소설도 역시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 그 존재도 알 수 없었을 - 소설이다. 하지만 읽고 난 후 든 생각은 내가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이었다. 아무런 배경지식이나 사전 정보가 없는 채로 이 소설을 읽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소설을 책의 맨 끝에 실린 번역가의 후기를 먼저 읽고 읽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면 이 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내가 주의를 기울여 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도중에 종종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것은 총5권으로 구성된 목차와 그 중간중간에 막간극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간,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번역가의 해설을 읽고 뒤늦게야 확실히 인식한 것인데, 이 소설에는 모두 다섯 개의 개별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며, 그 중간에 막간극이라는 이름으로 앞의 장에서 미처 이루지 못했던 인물들의 상황이 만약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 하에 그다음 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총 다섯 권(''이 아니라 ''으로 표기되어 있다)의 이야기는 모두 다른 인물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이도 하면서, 각각의 막간극의 '가정'으로 인하여 한 인물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혼란스러움을 느낀 이유이기는 한데, 해설까지 다 읽고나서는 오히려 그 사실이 무척 새롭고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 소설이 다섯 개의 개별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장편소설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막간극이라는 연극적인 요소의 삽입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그 아이가 만약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그다음 권의 이야기가 되고, 또 그 다음 이야기가 되고, 또 그 다음 이야기가 된다.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막간극은 그렇게 죽은 이가 살아서 생을 살아간다면, 이라는 소설적인 가정이자 각 권을 이어주는 매개체처럼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각 권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죽음의 그림자는 늘 드리워져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냉전시대의 동독과 소련 등이 소설의 배경이라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더욱 깊게 각인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을 사회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근원적인 죽음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제목은 그렇게 각각의 저녁(죽음)이 저물 때(다가올 때), 즉 삶의 어느 단계에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최종적으로 다가왔을 때(최종적으로 나이가 들어 생을 마감하게 될 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설의 끝에 실린 배수아의 말을 여기 적어두고자 한다. 누군가 이 책을 처음 읽고자 한다면, 어쩌면 이 대목만 읽어도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 소설에는 다섯 번의 죽음이 등장하지만, 마지막 제5권을 제외하고는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우연과 무수한 가능성들의 무작위적 조합이 운명을 만든다면, 인생의 이야기를 한 가지로만 규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깔려 있다. '나'라는 존재는 무수한 가능성 중의 한 가지 사건일 뿐이다. 그 가능성을 새로이 조합해보는 실험이 이 책에서는 '막간극'이라는 형태로 등장하여 소설의 구성을 더욱 독특하게 만든다. 소설은 허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 허구에 허구를 더한 '허구의 허구'에 해당한다. 이 사실은 주인공들이 전혀 이름을 갖지 않는 데서 오는 익명의 불특정성과 함께 -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그 또는 그녀로만 지칭된다 - 독자에게 모종의 '소설적 진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던진다는 특징이 있다. 개인의 삶이 오직 우연이란 인자에 의해 결정된다면, 개인적 삶의 총체이기도 한 역사는, 그렇다면 무엇일까? 하는 물음과 더불어."(306~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