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여름 한 조각

시월의숲 2019. 8. 10. 23:40

입추가 지났다. 아직은 한여름인데, 입추,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여름이 한 뼘 정도 물러난 것처럼 느껴진다. 기세등등한 여름 더위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것만 같다. 자꾸 입추라고 이야기하면, 가을이 아주 조금은 빨리 다가오게 될까?


저번 주에는 고모가 와서 아버지와 함께 명봉사에 갔다. 어렸을 때는 여름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명봉사였다. 오래전에 가족들이 모여 명봉사에 갔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말해 명봉사 계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명봉사라고 하면 당연히 절이 아니라 계곡을 생각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구면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명봉사 아래로 흐르는 계곡에는 피서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때의 기억. 시원한 나무 그늘과 차가웠던 계곡물의 기억. 그리고 가족들. 희미한 기억 속의, 지금보다 훨씬 젊거나 어렸던, 혹은 아직은 살아있었던 가족들과의 한 때. 나는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명봉사 계곡에 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간 계곡은 오래 전에 갔을 때보다 많이 닳아있는 느낌이었달까, 황폐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 계곡은 이제 지쳐 보였고 나이가 들어 보였다. 사람들도 예전보다는 많이 없었다. 나는 계곡도 지쳐보일 수 있다는데 놀랐고, 예전보다 사람들이 많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 취사가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텐트를 치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들은 취사금지라는 현수막 아래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우리들은 계곡 아래 쪽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펼쳤다. 가져온 것이라고는 각자 음료수 하나씩 뿐이었다. 우리들은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계곡물에 발을 담궜다. 여전히 차고 맑은 물이었다. 기온도 계곡 바깥보다는 몇 도 낮게 느껴졌다. 좀 지쳐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계곡물은 흐르고 나무들은 햇빛을 막아주었다.


돗자리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니, 보이는 거라고는 푸른 잎사귀들뿐이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지던 푸른 잎사귀들. 부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뭇잎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으나, 사진으로 본 풍경은 얼마나 밋밋하고 시들했던지. 내가 느꼈던 그때의 감흥을 사진은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란 얼마나 찍기 어려운 일이던가. 뭐 그런 생각을 생각을 하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지금 이곳에 있고, 내 발 아래로는 차가운 계곡물이 흐르고, 눈을 뜨면 연둣빛 잎사귀들이 태양을 막아주고, 내 옆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멋진 순간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설핏 잠이 들었던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아버지가 나를 툭툭치며 명봉사에 올라가보자 했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알았다고 말하며 일어났다. 


그렇게 명봉사에 올랐다. 명봉사는 계곡에서 가까웠는데(예전에는 왜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처음 길을 잘못들어 법화암 쪽으로 가게 되었다. 한참 올라가다가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는 다시 내려왔는데, 내려오다가 보니까 지금 우리가 간 길은 명봉사가 아니라 법화암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았다. 분명 법화암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명봉사 가는 길에 여름철이라 피서객들의 차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막아놓은 것을 우리는 출입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명봉사에 가서 절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미처 알지 못한 나무였다. 절은 예전보다 많이 정리되고 가꿔진 느낌이 들었다. 반면 계곡은 예전보다 많이 지쳐보였으니, 그 두 공간의 상반된 느낌이 어쩐지 아릿하게 다가왔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아니 정말 그런 건지도 모른다.


숲은 오후가 되자 금방 어두워졌다. 우리들은 돗자리를 접고, 가져간 쓰레기를 주워담아 명봉사 계곡을 내려왔다. 피서라는 말답게, 정말 더위를 피해서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월 말에 간 월영야행이 내 여름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 여름은 끝나지 않았나 보다. 물론 그때는 입추가 오기 전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입추라는 말이 아쉽게 들릴만한, 여름의 한 조각을 맛 본 기분이다. 그로 인해 조금 더 이 더위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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