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시월의숲 2019. 8. 19. 22:01



오래 전에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좋다고 느꼈다면 왜 좋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딘가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록해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좋다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 좋다는 말 외의 말로 그 좋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니까. 좋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의 난감함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쩌면 그건, 내가 그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일까 아님 실은 덜 좋아하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한 채로 김애란의 소설을 읽었다. 이번이 그의 소설과는 세 번 째 만남이었다. 첫 번 째 소설집인 <달려라, 아비>와 두 번 째 소설집인 <침이 고인다>에 이은. 내가 두 번 째로 읽은 소설집과 이번에 읽은 소설집 사이에 하나의 소설집이 더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읽지 못했고, 그래서 한동안 김애란의 소설과는 멀리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그의 소설을 읽었다. 이상하게 그의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도 내가 좋다고 느꼈던 감정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번 소설집도 무척 좋았는데 그건 처음 내가 그의 소설을 읽고(구체적으로는 첫 소설집인 <달려라, 아비>를 읽고) 느꼈던 좋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다름'을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소설집을 읽고나서 한동안 딴청 피우듯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김애란의 소설을 생각했던 것도 아마 그 난감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내게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내가 느낀 '다름'은 정말로 다른 느낌일까? 어떤 '다름'인가? 오래 전에 읽은 그 소설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해야겠다. 오래전의 책들은 아주 미미한 잔상처럼, 옅은 실루엣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지만, 지금 나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김애란의 소설들을 읽었으니까. 그 소설들이 내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말하면 되는 것이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이리도 주절주절 한단 말인가? 어쩌면 이것은 내가 그동안 그의 소설을 읽고 나서도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망설였던, 그 망설임의 흔적을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망설임의 흔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느꼈던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감정은 바로 '상실'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전부 실제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모두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상실했다. <입동>에서는 아이를,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강아지를, <건너편>에서는 남녀간의 애정을, <침묵의 미래>에서는 언어를, <풍경의 쓸모>에서는 아버지를, <가리는 손>에서는 자신의 믿음 속에 존재했던 아들을,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어버렸다. 불현듯 맞닥드리게 되는 죽음 혹은 상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은 듯 외면하며(다 잊었다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삶의 어느 시점까지는 아물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지속적으로 현재의 삶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그것을 모른채 아파하다가 어느 순간 앗!하고 깨닫고는 눈물을 왈칵 쏟지는 않는가?


소설은 거기까지 보여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앗! 하고 깨닫는 그 순간까지. 그 순간이 따뜻함을 암시할 때도 있지만, 조금 더 아파할 수 밖에 없음을,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숙할 거라는 걸 예감케 한다. 특히 <노찬성과 에반>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가리는 손>에서처럼 자신이 믿었던 아이가 자신의 믿음과는 상당히 멀리 있을지도 모른다는 차가운 인식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속 주인공처럼 남편을 잃었지만 '나'는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음을 자신의 온몸에 퍼지는 붉은 반점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상황에 더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아직 더 울 수 있는 것이다.


<입동>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밤에 갑자기 도배를 하자던 아내의 말에 도배를 하다가 사고로 잃은 아이가 벽에 써놓은 이름을 발견한 순간의 모습이. 앞서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한 번 읽어보라고. 읽어보면 왜 좋은지 알 수 있을거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좋은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내가 김애란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텅 빈 눈동자가 불 꺼진 형광등처럼 어두웠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 아니 쓰다 만 이름을 어루만졌다. 순간 어디선가 영우가 다다다다 뛰어와 두 팔로 내 다리를 감싸안을 것 같았다. '토닥토닥' 그런 건 아디서 배웠는지, 제 엄마 등을 말없이 두드려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37쪽, <입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