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시월의숲 2019. 10. 2. 22:29

언제부터인가 글을 구구절절 길게 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렸을 때는 책이 조금만 두꺼우면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그래서 조금만 호흡이 긴 글을 읽으면 그만큼 길게 심호흡을 하고 겨우 읽고는 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산문과 비교해서 단순히 짧다는 이유만으로 시를 읽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어서, 어떤 시인의 시집을 읽기 전에 그 사람의 산문집을 먼저 읽는 버릇 또한 생겼습니다. 릴케가 그렇고,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 목록에 추가해야 할 한 명의 작가가 더 생겼습니다. 이름은 박준, 책의 제목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이라고 하는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은 참으로 감성적인 언어들로 쓰인 따뜻하고 아름다운 산문집이었습니다. 읽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도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사랑, 추억, 기억, 유년시절, 여행, 풍경, 아버지 등등), 느낌들이 시인 고유의 서정적인 언어로 담담하게 쓰여 있었어요.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시인들은 어떤 느낌으로 산문을 쓸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산문을 쓰는 사람의 시는 어떨까 짐작해보기도 하고요.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극도로 정제된 언어와 최선의 단어를 골라내는데 익숙한 시인에게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야 하는 산문은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르고요. 소설가가 시를 쓰는 경우도 그와 비슷한 간극이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서두에 제가 글을 길게 늘여쓰는 버릇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든 첫 번째 생각이었어요. 저는 이 책을 읽고 글을 길게 쓰는 것과 짧게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물론 짧게 쓰는 것이 바로 '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생각을 길게 늘여 쓰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문득 궁금했습니다. 시심(詩心)어린 글이란 글의 길고 짧음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짧게 쓴다고 쉬운 글이고, 길게 쓴다고 반드시 어려운 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저는 글의 길고 짧음에 왜 집착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글이 길어지는만큼 쓸데없는 말들이 군더더기처럼 붙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그것을 건지고 건져서 핵심만을 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산문이 부러운 것은 그것이 시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글이 길더라도 구구절절이 되지 말고, 그저 절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렇듯이, 징징댄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혼자 징징대면 더 창피할지언정 속은 조금 후련해지지 않겠습니까. 딱 맞는 대구법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