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책, 2013.

시월의숲 2019. 9. 22. 00:41

 

 

어젯밤 술자리에서 지인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의 현재 안부를 전하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반가웠는데, 그의 입에서 <모비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더 반가워서 아, 그 책! 하면서 새삼 그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는 갑작스레 호들갑을 떠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는데, 나도 그렇고 그도 술기운이 제법 올라서 우리는 서로 읽지도 않은 그 책에 대해서 흥에 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마치 그 책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아직 읽지도 않은 그 책에 대해서 유별나게 호들갑을 떤 이유는, 그 책이 아니라 그 책에 대해서 쓴 다른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전까지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해서 작가의 이름과 제목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완독한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지은 <모든 것은 빛난다>에 그 책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기에, 그가 <모비딕>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무척 반갑게 반응했던 것이다. 물론 <모비딕>이 어떤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는 그 사실만으로 곧 내가 <모비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모비딕>보다도 그 책을 바탕으로 '모든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바로 그 책이 때문이라고 해야 하리라.

 

의미를 잃어버린, 그리하여 허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삶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모든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단테의 <신곡>, 그리고 멜빌의 <모비딕>을 언급한다. 각 시기마다 주요하게 빛났던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현재 우리들이 직면한 지독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가졌음직한 '신성(神聖)'을 발견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불가능해보이는 이 의미 찾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심스러웠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현대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무의미에 이르는 병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의아했던 것이다. 아무런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너무 쉽고 가벼우며 식상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그리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 만큼(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자그마한 희망을 줄 정도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설득력은 저자들이 책에서 언급했던 것들이 실제로 내가 살아가면서 느꼈으나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웠던 느낌들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는 점과 상통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모든 사물들 혹은 사람들에게 있는 '신성' 혹은 '빛'이란 우리가 발견해내지 못할 뿐, 거기 늘 존재했던 것이며, 드물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내는 순간이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것을 우리가 조금 더 자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옛 장인들이 기울인 것과 비슷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런 노력을 할 때에만 그것들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우리들의 삶을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편안함에 젖어 있게 하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조금은 불편한 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 삶의 반짝이는 순간은 테크놀로지의 편안함 속에 젖어 모든 것들을 빨리 지나칠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내비게이션이 발명된 이후로 우리는 길가에 핀 꽃이나 나무들, 길의 모양이나 주위의 집과 건물들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로 가기 위한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운전만 하면 될 뿐이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금 당장 문명의 모든 이기들을 뒤로한 채 자연 속으도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들을 둘러싼 테크놀로지와 상생하며,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러니까 테크놀로지에 함몰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사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내비게이션을 활용하되 때로는 내비게이션을 끄고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 책의 취지와 달리, 나는 오래전부터 의미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강압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왜 모든 일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가? 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나는 모든 의미들에 지쳤고 그래서 차라리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겠다는 치기 어린 생각까지 했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책 또한 무수히 강요된(누군가에 의해서인지도 모른 채) 의미 만들기의 식상한 판본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은 선택을 강요하지도, 의미를 주입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고전 속에 숨겨져 있는, 아니 드러나 있지만 그 누구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를 우리에게 새롭게 펼쳐 보인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신을 잃어버린(니체의 표현대로라면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 우리들은 무한히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히 불행하다. 우리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없다. 우리들은 한없이 강하며 한없이 나약하다. 우리들은 끝없이 발전해나가면서도 끝없이 추락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천체망원경으로 달의 표면에 새겨진 굴곡까지도 세세히 볼 수 있지만,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이나 구름의 모양, 새떼들이 허공에 그리는 무형의 춤이나 오래된 담장의 이끼는 보지 못한. 우리들은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아무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시대임에도, 이런 시대이기에 더욱 우리는 허무에 대해서 사유해야 하며, 허무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은 빛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깨닫는 것은 그 이후라도 충분하다. 모든 것이 빛난다는 사실을 안다면(그러니까 모든 것이 제 안에 '신성' 혹은 '빛'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빛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다만 그 순간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 들어오던 눈부신 오월의 햇살 속에,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던 길에 문득 고개들 들면 수 십 마리의 참새떼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던 모습 속에, 일요일 오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마시던 커피의 향기 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키던 낙엽 태우는 냄새 속에, 이백 년이 넘은, 크고 푸르던 나무의 그늘 아래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 속에 그것은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들이 빛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