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015.

시월의숲 2020. 3. 7. 15:20

내 삶을 책으로 엮는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분량의 책이 될까? 그 사람의 생이 길면 긴만큼 많은 내용의 이야기가 담기게 될까? 아니면 살아온 시간과는 별개로 남들과 얼마나 다르게 살았는가에 의해서 한 사람의 일생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책을 쓸 수 있는가? 누구보다 평범하다 생각되는 삶일지라도 혹은 누구보다 보잘 것 없다 생각되는 삶일지라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어떤 공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평범하면 평범한대로, 보잘 것 없다면 보잘 것 없는대로 우리는 매일 우리들의 빈 페이지들을 채워나간다. 그 평범함과 보잘것 없음을 그저 묵묵히 쓰는 것이다. 누구나 다 특별할 수 없고, 누구나 다 재능이 출중할 수 없으며, 누구나 다 비범할 수는 없다. 소설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특별하고 희귀하며, 비범한 이야기, 혹은 독특하고 신기하며 자극적인 이야기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그와는 정반대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평범한 일생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평범하고 급기야는 지루하다 생각되는 사람의 소소한 이야기가 결코 평범하지도, 지루하지도, 소소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의 일생을 이렇듯 자연스러운 문체로,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으면서 짐짓 웅장할 정도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도와 농삿일을 하다가 대학교에 가게 되면서 문학에 눈뜨고 교수가 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야기가 이렇게 슬프고 비극적일 수 있다니.
 
단 몇 줄로 요약될 수 있는 그의 일생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오랜기간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진 흔들리지 않는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아니 그의 삶을 따라가면서 몇몇 극적인 변화의 장면마다 숨을 죽이며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바로 문학에 대한 애정(혹은 희열이라고 해야할까. 소설 속 그는 영문학 교수로써 자신의 연구와 직업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각했다)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대학이라는 다른 세상의 물결을 맛본 그가 결국 부모님 곁으로 가지 않고 대학에 남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부터 그는 더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게 된다. 그의 그런 단호한 결심처럼 그의 문학에 대한, 사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신념은 그를 오히려 깊은 고독 속으로 빠뜨린다. 그는 그저 그의 삶을 살 뿐인데,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 고독하게 하다니! 그 지독한 아이러니가 나는 슬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슬퍼만 할 일인가? 그의 삶을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바라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처럼 악을 물리치고 가족의 사랑을 쟁취하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만 위대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위대함이란 무엇이길래? 세상에는 대학교수인 스토너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스토너는 대학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나름 실력도 인정을 받았으며, 결혼까지 했고, 아이도 있으니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기 때문에 스토너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일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하고, 위대하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스토너'는 조용한 삶 속에 스며있는 고요한 비극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츠비처럼 무언가를 위해 오랜시간 견딘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단순하지만 찬란한 이야기'라는 평은 이 책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코로나로 나라가 어지럽기 전에 읽었다. 읽고나서 한동안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을 써야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지금 이 시국과 스토너의 고독이 어쩐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생각해보아도 참 이상한 일이다. 지금 온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 자가격리에 들어가고, 사람들과 만남이 꺼려지고 있는 이 시기에, 나는 왜 스토너의 고독한 성정이 떠오른 것인지. 어쩌면 아부를 모르고, 순수하게 문학의 세계에 몰두할 줄 알며,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그의 개인적이고 고독한 삶의 태도가 외부와 단절되어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하는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리라.
 
그의 죽음을 슬퍼만 할 일인가? 앞서 물었던 물음을 다시 물으며 나는 맨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세상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모든 일들을 그저 관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누가 뭐라해도 그저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도록. 오로지 그것에만 몰두하도록. 그는 그렇게 그의 삶을 살아내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