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워크룸, 2019.

시월의숲 2020. 1. 28. 23:33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자신을 기억해 내려는 행위는 무용하며 오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감각을 따라가는 것만이 최선임을, 우리는 곧 알아차렸다.(11쪽)

 

이런 식의 감상문은 어떨까? 배수아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들 중 인상적이었거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배합하여 감상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느낀 점에 대한 내 생각(오해와 다름없는)을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 나왔던 문장들을 꺼내서 그것만으로 나만의 감상문을 만든다. 그 감상문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는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알게(느끼게) 된다. 그것은 비록 내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모든 독서가 조금씩은 그렇지 않은가?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배수아의 소설은 직관에 기반하였다고 느껴지기에, 나만의 직관에 의해 선별된 배수아의 문장들 속에 그가 하고 싶어하고, 관심있어하는 것들을 찾는 것 또한 나만의 독서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배수아의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를 읽는다.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따로 기록해둔다. 읽는 동안 잠깐 딴 생각을 하거나, 다음 날 다시 책을 펼쳐 읽을 때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떤 장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다시 앞장으로, 앞장으로 넘어가야 했던 번거로움은 잠시 접어두고. 아니, 그 번거로움조차 이 소설을 읽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책을 읽어나간다. 나는 굳이 앞의 내용들을 다시 떠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떠오르면 떠오른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대로 그냥 묵묵히 읽어나간다. 오로지 읽는 것, 그 자체만이 이 소설을 '오해'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읽으면서 앞서 읽었던 것 같은 문장들이 다시 나올 때면 순간 기시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기시감이 아니라 실제로 반복되어 나온 문장들이었음을 깨닫고는 놀라곤 했다.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소설 또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소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꿈의 언어인가? 혹은 현실에서 꿈으로 유입되는 언어들의 현기증인가? 이야기는 와해되고 장면들은 희미하게 중첩되며, 이미지들 또한 파편화된 이 소설은 대체? 이것은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추상 연극'의 한 장면인가? 하나의 단서가 있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낭송극을 염두해 두고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송극은 무엇인가?

 

소설 속 주인공인 우루는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오래전에 있었던 놀라운 일들, 젊은 날의 자신을 모종의 충격에 빠뜨렸던 일들에 대해서 점점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고, 사실은 오늘 하루도 종일 그런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여자가 불쑥 고백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쓰기 위해서 멀리 온 것 같아요."

그리고 손님이 요청하기도 전에, 여자는 침실에서 노트를 가져와 자신이 쓴 글을 읽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주저하면서. 그러나 곧, 여자는 읽기에 몰두하여 손님의 존재를 거의 잊는다. 아니,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 주는 자신을 잊고, 오직 내면의 언어로, 내면에 잠긴 얼굴로 회귀해 버린다.(82~83쪽)

 

오래전에 있었던 놀라운 일들, 젊은 날의 자신을 모종의 충격에 빠뜨렸던 일들에 대해서 쓰기 위해 우루는 멀리서 왔다. 그리고 우리가 요청하기도 전에, 우루는 침실에서 노트를 가져와 자신이 쓴 글을 읽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주저하면서. 그러나 곧, 우루는 읽기에 몰두하여 우리의 존재를 거의 잊는다. 아니,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 주는 자신을 잊고, 오직 내면의 언어로, 내면에 잠긴 얼굴로 회귀해 버린다. 우리는 그런 우루의 목소리만을 듣는다. 목소리만이 남는다. 허공에 울려퍼지는 언어의 목소리, 목소리의 언어. 지극히 개인적인, 혹은 지극히 원시적인. 결국 우리는 우루가 되고 우루는 곧 우리가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과거라는 암흑 속 메아리. 사로잡힘. 목소리의 주술. 말해지는 언어의 소리. 그것이 곧 낭송극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이 혼자만의 낭송극으로 끝난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건 너무 고독한 일이 아닌가?

 

너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연극이 끝나는 날까지. 연극이 정말로 끝나는 날까지.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그건, 삶은 발명되어야 하고,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야.(165쪽)

 

작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은 발명되어야 하고, 아름다움은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은 후에도 나는 저 문장으로 인해 고독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