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권여선, 『레몬』, 창비, 2019.

시월의숲 2020. 4. 5. 22:49

하나의 사건은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 곧 누군가의 죽음일 때, 그 죽음과 관계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그 사건은 그들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가.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우리가 모르는 사건의 이면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가.


권여선의 <레몬>은 이렇듯 한 여학생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죽은 혜언의 동생이자, 친구들이다. 이 소설은 각 챕터마다 돌아가면서 혜언의 친구인 상희, 친동생인 다언, 같은 반이었던 태림 등 여성 화자들을 중심에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제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인터넷에서 작가 인터뷰를 찾아보았는데, 그는 이 소설을 마치 전격적인 장르물처럼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과연 미모의 여고생을 죽인 살인범은 누구인가' 궁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목적은 범인이 누구일까 추리를 하게 만드는데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소설은 한 여고생의 죽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삶의 균열과 맞닥드리게 되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사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언니가 죽었다고 해서, 친구가 죽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중단되었는가? 죽은 혜언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흘려보내야만 하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작가는 아마도 그 지점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범인이 누구였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행위는 혜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죽은 혜언의 동생과 혜언의 친구는 학창시절 같은 문예반에서 시를 썼다. 그 둘의 만남은, 처음에는 시로 이어지다가, 혜언의 죽음으로 인해 시와 멀어지게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시를 이야기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상징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원초적인 언어(시)를 잃어버린 자리(죽음)에서 구원(위로 혹은 삶)이란 다시 언어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도 시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음을.


어쩌면 이 소설은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죽음에 대한 마지막 애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