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숨,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문학동네, 2019.

시월의숲 2020. 2. 1. 22:54

오래 전, 그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오래 전의 어느 날, 나는 도서관에서 김숨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아니, 이 조차 확실하지 않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도서관이었는지, 신문의 책소개란에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경로였는지. 지금 내가 도서관에서 처음 보았다고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에 나는 지금보다 더 자주 도서관에 갔고, 더 많은 책을 읽었고, 더 많은 고민과 생각에 잠기곤 했으며, 그래서 나를 둘러싼 세상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내 뚜렷한 취향도 알지 못한채 그냥 눈길 가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읽던 시기였다. 아마도 나는 당시 도서관의 한국소설 코너에서 이런저런 소설을 훑어보던 중 '김숨'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작가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그 이름에 이끌려 책을 뒤적여보던 중 '간과 쓸개' 혹은 '국수'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을 것이고, 그 중 한 권의 책(아마도 '간과 쓸개'가 아니었을까)을 대출해 집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이상한 일은, 거기까지의 기억은 안개 속에 잠겨 있는듯 흐릿하지만, 그렇게 가져온 책을 불과 몇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반납했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내게 김숨은 그렇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온갖 고민과 아픔, 절망을 나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생각하던 때라서였을까? 그래서 더욱 김숨의 소설이 무겁게 다가왔고, 나는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 읽지 못했던 김숨의 소설을 지금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때 좌절의 기억이 있었기에 지금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갈 때쯤, 마침 그의 등단작을 포함한 세 편의 소설이 실린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가 출간되었고, 나는 이상한 힘에 이끌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었다.

 

어쩌면 나는 김숨이라는 이름이 지닌 독특한 울림과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라는 책 제목의 알 수 없는 이끌림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그가 쓴 어떤 글도 제대로 읽지 않은 내가 새삼스럽게 그의 책을 찾아 읽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갑작스러운 - 혹은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간신히 가 닿을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 이끌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글은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라 김숨이라는 작가에 대한 나만의 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글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면, '존재에 대한 탐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서사'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이미지''상징'으로서 한 존재의 양상을 그려보인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혹은 '내가 왜 없는게 아니라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또 묻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무를 만지고 있음에도 '나무를 만질 수 있는가'를 묻고(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뿌리의 생김새와 못박힘에 대해서 생각하며(뿌리 이야기), 차가운 어항 속에 유폐된 물고기(슬픈 어항)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엔 이런 문장들이 나올 수 있는, 아니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뭐에 대해 쓰고 싶은데?"

"나무……"

"나무에 대해 쓰려면 나무를 생각하지 않아야 해."

"나무를 생각하지 않고 나무에 대해 어떻게 써?"

"나무를 몰라야 해."

"나무를 모르는데 나무에 대해 어떻게 써?"

"나무를 모른다는 것도 몰라야 해."(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