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시월의숲 2020. 8. 1. 19:48

 

한 권의 책을 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과연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 아님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그 둘은 결국 같은 것일까?) 원래부터 무언가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그때그때 기록해놓지 않으면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래 전에 적어놓은 글이나 찍은 사진들을 봤을 때, 망각의 숲을 헤치고 올라가 겨우겨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과거의 한 시절은, 오로지 내가 써놓은 짧은 글이나, 누군가의 사진 속에서만 겨우, 미미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뭐랄까, 슬프다기 보다는 좀 덧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때 내가 읽었던 것, 그때 내가 본 것은 다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 물론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의 방증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읽은 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조해진의 <빛의 호위>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인데, 괜히 서두가 길었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왜 읽으려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마치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책을 읽듯이 조금은 생경한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개봉하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둥그런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장난감을 손에 든 아이마냥 조금은 설렌 기분으로.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또다른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불쑥불쑥 떠오르는 상념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파도에 밀려온 불가사리처럼 불가해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이제는 뭐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처음 떠오른 문장이 그것이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인가. 

 

이 소설의 인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다. 총 아홉 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생각보다 거시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창하게 펼쳐지기보다는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수렴되어, 보다 내밀하고, 알려지지 않은 아픔들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장악했던 이념의 거센 파도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려깊은 보고서이자 따뜻한 위로 같았달까. 남겨진 자, 소외되었거나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표제작인 <빛의 호위>는 소외되고 고통받았으되, 결코 어둠에 먹혀버리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를 구해준 건 화자가 건네 준 하나의 사진기였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어둠이 한 사람의 인생을 덮칠 때, 더이상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라도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이 결국 우리를 어둠으로도 혹은 빛으로도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물론 빛을 향해, 빛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오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다시, 나는 이 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 둘은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주 쓰는 방식으로,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이 마지막에는 교묘하게 이어지게 되는 것처럼. 나는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말하고,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내가 쓰는 모든 것들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수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것이었으리라. 나 또한 빛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싶다, 고. 한 사람의 생에서, 결정적이었던 구원의 순간은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거라고. 그렇게 긍정적이고 싶다고. 나 역시,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