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명인, 『내면 산책자의 시간』, 돌베개, 2012.

시월의숲 2020. 6. 13. 22:52

순전히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김명인의 런던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내면 산책자의 시간>은 대학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며, 계간지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인이라는 사람의 6개월 간의 런던 생활 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저자의 이름만 보고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시인을 떠올렸으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하긴 김명인이라는 시인의 시도 읽어보지 못했고, 김명인이라는 교수의 문학평론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나는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먼저 시인의 이름을 떠올렸으니,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시인 때문에 역시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교수의 산문을 읽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건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보다 앞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제목 때문이었다. 나는 때로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기도 하니까. 

 

그의 조금은 특별하거나,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런던에서의 내면 일기를 읽고 있노라니, 그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선명한 인상이 그려진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써의 풍모를 풍기며, 그에 걸맞게 학창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그러다 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리얼리즘 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역시 참여적이고 사회성 짙은 계간지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시대를 비판하고 고민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런 지식인으로써의 자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반성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요즘 읽히는 소설 작품들은 너무나 소소하거나 가벼워서 성에 차지 않는다는 취지의 일기는 내가 느끼기에 조금 부당한 듯 보이다가도 그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늠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런던의 한 대학에서 초청 교수로 6개월 간 머무르는 동안, 그는 혼자 밥을 지어먹고, 책을 읽고, 박물관을 돌아다니고, 클래식 공연을 찾아 듣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가 앓고 있는 병(피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논문을 쓸 여력도, 더 먼 곳으로의 여행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그는 그곳에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생활하러 간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그의 유별난 클래식 사랑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클래식 공연을 찾아다니며, 집에 홀로 있을 때도 클래식을 듣고,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음반을 구입하고, 이베이에서 소형 프리엠프인 쿼드 33을 싼 값에 낙찰 받아 그것을 받으러 로체스터라는 곳으로 직접 가기도 한다. 그런 클래식 애호가인만큼 클래식 공연이나 음반, 연주자 등에 대한 전문가 뺨치는 식견은 이 책을 읽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나는 언젠가 그가 클래식 관련 책을 하나 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젊은 날을 격렬하게 보낸 한 지식인의 조금은 쓸쓸하기도 한 일기는 6개월로 끝이 났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삶의 새로운 도약이 되었기를 바랐다. 바깥을 향해 저항의 몸짓으로 부르짖던 그 투쟁의 언어는, 그의 나이 50이 넘어서야 내면으로 걸어들어오는 산책자의 언어가 되었다. 물론 그 산책자의 시간은 런던이라는 공간과 6개월이라는 시간으로 인해 생겨난 불가항력적인 주어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시간이었으며, 그 낯섦의 시간이 있었기에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제일 마지막 일기, 아니 새로운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떠났던 자리에 돌아가 다시 아귀를 맞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망명의 감성을, 이 어긋남의 감각을 할 수 있다면 끝까지 가져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일기는 에필로그가 아니다. 그 낯설음과 자유의, 아니 낯선 자유의 기억을 온몸에 새기고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3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