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시월의숲 2020. 9. 29. 23:38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상. 그것을 글로 쓴 것이 결국은 소설이 아닐까. 

 

김연수의 오랜만의 장편소설인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나타샤와 당나귀와 흰 눈을 좋아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한 사람, 바로 백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해방 이후 북에 머무른 그였기에 북에서의 행적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은데, 작가는 바로 그 시절의 백석에 대해서 상상한다. 그 상상의 결과물이 바로 이 소설이다. 하지만 머릿속 상상으로만 소설이 탄생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백석에 대해서 쓰자면, 일단 백석과 관련된 여러가지 사료들과 사건 등을 바탕으로 소위 취재라는 것을 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한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작가는 백석의 어느 한 시절을 구상해내고, 그 공간으로 우리들을 데려다 놓는다. 우리는 그곳을 작가와 함께 걸으면서 백석이 했을 법한 고뇌와 아픔, 그리움과 환멸 등을 상상한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활자들 사이로 빠져들어가던 그 순간이 좋았다. 책을 읽는 그 순간만큼 나는 백석과 함께 평양 혹은 함흥, 삼수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몇 편의 시로만 알고 있던 백석이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심지어 마치 지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 책이 백석의 전기였다면 오히려 내가 느낀 이 감흥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백석이 북한 삼수군의 협동조합에서 일하기 전후 몇 년을 그려 보이는데, 당시 백석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아름다운 시들을 이미 다 쓰고 난 후였다. 그러니까 시를 더이상 쓰지 못하던 시절, 당으로부터 유약하다며 사상적 의심을 받던 그 시절의 이야기인 것이다.

 

시를 쓰지 못하는, 정확히 말해서 <사슴>이라는 시집에 담겨있던, 그가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시가 아니라 체제의 선전과 수령의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시만을 쓰라고 종용받던 시절의 백석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작가는 그 시절의 백석에 대해서, 그의 고뇌와 그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서 상상하면서 백석의 한 시절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거처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백석이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주 작고, 사소하며, 아련하면서도 정감어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답고 쓸쓸한, 우리 내면의 순수한 언어들. 어떤 것들은 그냥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추억에 젖게 만든다. 백석의 시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상. 그것을 글로 쓴 것이 결국은 소설이 아닐까 하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김연수의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했다. 소설을 다 읽고 백석의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들춰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가 만든 언어의 세계 속에서 당당히 살아 있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