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시월의숲 2020. 5. 24. 20:52

제목처럼 단순하고 간결한 이야기이지만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되고 난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상황에 놓여야 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모든 산과 집들이 타고, 재가 되고, 문명의 모든 혜택들과 이기들이 파괴되고, 심지어 인간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그런 말 자체가 사라져버린), 오로지 산 자와 죽은 자만이 존재하며, 산 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잔혹한 디스토피아의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 주인공인 남자와 그 아들은 폐허가 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길은 오로지 검은 재로 뒤덥혀 있고, 먹을 것을 찾아 불에 타버린 집을 뒤져야 하며, 혹 다른 사람들에게 먹힐까봐 늘 총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무법과 야생, 공포와 추위로 가득한 허허벌판에 그들은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이 가는 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찢어진 지도를 들춰보며,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걸어가지만, 그렇게 걸어간 남쪽의 바다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아들과 함께 묵묵히 걷는다. 걷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이.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온통 죽음의 표지만이 가득한 길 위에서 죽지 않으려면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길이지만,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남자는 잘 알고 있다.

 

남자의 걸음이 필사적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아들 때문일 것이다. 아들은 자신이 계속 걸어가야 할 이유이자, 그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들을 통해 깨달으며, 아들과 함께 희망없는 걸음을 계속한다.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가 어째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가. 나는 소설의 마지막, 두 부자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격한 슬픔과 따뜻한 위로가 동시에 느껴지는 강렬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