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윌리엄 버로스, 『정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시월의숲 2020. 11. 1. 23:53

마약이 세포의 방정식이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 사람.

 

처음으로 마약 중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윌리엄 버로스라고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를 졸업하고 사립 탐정, 해충구제업자, 바텐더, 신문기자 등 여러가지 일을 한 특이한 이력의 작가. 이 책은 본인이 마약에 빠지게 된 경위와 마약을 끊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 상황 등을 무덤덤하게 그린 자서전이었다.

 

작가가 마약에 빠지게 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내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암울하고, 반항적이며, 전복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윌리엄 버로스 자신은, 당시의 안정적이고 부유한 생활이 위선적이고 거짓으로 가득한 허위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끊임없이 마약에 손을 댄 이유도 어느정도 그러한 기성세대 혹은 기존의 사회질서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 허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은 그야말로 자신이 마약에 빠지고, 어느 순간 끊고, 다시 마약에 빠지는 주기를 그저 무덤덤하고 건조하게 그려보인다. 그 묘사에는 어떤 거추장스러움도, 야심도 없으며, 선동적이거나 자신만의 철학을 관철하려는 의지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마약을 극단적으로 옹호하거나, 타인에게 적극 권하지도 않는다. 그는 호기심에 마약을 시작했고, 별 생각없이 쓰다가 중독되었으며, 금단증상을 겪으며 끊었다가 다시 약에 손을 댄다. 그 뿐이다. 거기에 어떠한 가식도 끼어들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사실이 놀라웠다. 아무런 가식이나 미화없이 마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약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삶의 한 방식이라고 말하며,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견해가. '노화해 가고, 조심스러우며, 걱정 많고, 겁먹은 육신의 주장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 나는 놀라웠고, 이내 무덤덤해졌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이라는 것인가?

 

작가의 마약에 대한 태도는 그렇게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 책이 1953년에 나왔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지금 내게도 센세이션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지점 때문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는 것.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비틀어 본다는 것.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 쓰레기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의미를 부여하거나 부여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

 

앞서 이 책을 읽고 놀라웠지만 이내 무덤덤해졌다고 한 건, 지금 세상이 윌리엄 버로스가 살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으며, 우리는 그보다 더하거나 다양한 충격에 이미 만성이 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정키>가 특별한 이유는 금기시된 것(마약)에 대한 태도가 여전히 독특하고 문제적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