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시월의숲 2021. 1. 9. 16:11

마치 오래전부터 그 책을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책들이 있지요.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면서 마치 그 책을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 말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책이 너무나 유명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기억에 혼선이 생겨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가 쓴 에세이라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모른채, 어쩌면 제목 때문에 더 이끌렸을지도 모를, <자기만의 방>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오래 전에,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또 '각자의 방'이라는 제목으로도 글을 썼었지요. 모두 다 제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어요. 유년시절 제 꿈은 저만의 작은 방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그 소망이, 아직 읽지도 않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과 어떤 공명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까요. 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 글을 쓰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저는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읽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의 씨앗을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싹이 터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이치인 것일까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지만 마치 읽은 것처럼 생각되던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은 그저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이 책에는 <자기만의 방>과 <3기니>라는 에세이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였고, <3기니>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편지글 형식으로 된) 울프식의 답변이었어요. 두 편 다 작가 고유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이런게 버지니아 울프식의 표현방식이구나, 하고.

 

특히 <자기만의 방>은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우회적인 표현방식과 의식의 흐름대로 기록한 서술방식이 어우러져 무척이나 유려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에세이였습니다. 그렇다고 비논리적이라거나 감정에 치우친 글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역사적인 사례와 인물들, 신문기사와 전기 등 객관적인 사례들을 하나하나씩 열거하며 기술하고 있어서 무척 설득력이 있기도 했지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낡게 느껴지는 요즘 시대에 읽어도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은 글이었어요.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에세이의 핵심 주제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견해가 당시에는 왜 그리도 실행되기 어려웠던 것일까요? 그러면 지금은 나아졌는가? 물론 그때보다야 여성의 권리가 신장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은 존재하고 있지요.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 또한 완전히 인정받기란 아직 먼 일 같습니다. 그만큼 남성으로 상징되는 기득권(혹은 힘을 가진 다수)의 인식이 전환되기란, 그 책이 나온지 거의 백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에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차별이 없는 사회에 살 수 있을까요? 차별이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런 면에서 <자기만의 방>의 외침은 백 년 가까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효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수자들, 외면받거나 버림받은 자들, 비주류들, 아웃사이더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용기와 다짐 없이 있는 그대로 행동하더라도 당연한듯 받아들여지는 자들, 주류들, 기득권들이 존재하는 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겠지요.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기만의 방>의 외침은 늘 현재형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차별의 양상만이 달라질 뿐.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그 시대와 남성들(기득권)이 부당하게 가하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 여성 스스로가 독립적이 되기를 주문했지만, 저는 그것을 비단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한정하여 해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 글 속에서 여성이라는 단어를 이 세상의 차별받는 모든 소수자들로 받아들였습니다. 남성이 하나의 상징이 되듯이, 여성도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렸습니다. '자기만의 방'이 없던 시절의 나 자신 말입니다.

 

이 책은 모든 소수자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글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고, 기꺼이 그러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 혹은 희망의 전언이기도 합니다. 아, 비단 글을 쓰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글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서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 책의 진정한 가치인지도 모르겠어요. 오히려 페미니즘이니, 소수자들을 위한 외침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거창해서 이 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번역자의 능력인지, 책은 막힘없이 잘 읽혔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은 마치 잔잔한 호수의 일렁임 같다가도 거대한 파도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 의식의 흐름이 어디까지 흘러가는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제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계속 그것을 생각했고, 갈망했으며, 결국 이루어냈으니까요. 물론 '픽션'은 쓰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이 두서없는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더 듣는 일이겠지요. 이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니까요. 자기만의 방에서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나는 남성의 동료라든가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감정을 찾을 수 없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하고 나는 말할 겁니다. 그 말을 고귀하게 들리게끔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오로지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십시오."('자기만의 방',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