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해피 투게더

시월의숲 2021. 2. 8. 22:46

그 영화를 본 것도 같고 안본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에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가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새로이 개봉된다고 했을 때도, 그래서 요즘 시대에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개봉하고 있나 궁금해서 인터넷 사이트 들어가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만 있는 생활이 슬슬 지겨워져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과 마침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가 재개봉 되었다는 소식이 겹쳐져,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영화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가 정말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 속 장면들과 노래가 언젠가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생각은 ― 내가 이 영화의 예고편이나, 그동안 텔레비전의 숫한 영화 소개 코너 혹은 기억나지 않는 프로그램들의 어느 한 순간에 이 영화가 소개되었거나, 패러디 혹은 인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단순히 말해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또한 오래 전 <레드 드래곤>이라는 영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또한 절반 정도를 보고 나서야 내가 그 영화를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피 투게더>는 <레드 드래곤>과는 달리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명확한 확신이 들지는 않고, 그저 어렴풋이, 기억나지 않는 기억 속을 서성이듯 모호한 분위기만 느껴졌다. 나는 이 영화를 오래전에 어떤 경로로든 한 번은 보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극 중 장국영과 양조위가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는 장면이나 영화의 막바지에 장첸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등대에 올라가 카세트에 녹음된 양조위의 목소리를 해독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는 장면 등은 오래전에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나는 그것을 이 영화를 소개해주는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물론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이 영화를 1997년이 아닌 2021에 보았다는 사실일테니까. 오랜 시간을 통과해서 내가 '지금'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일테니까. <해피 투게더>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하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내가 그랬듯 언젠가 한 번은 보아야 할 영화, 아니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어느 한 순간, 한 번은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영화 말이다. 

 

아픈 사랑 이야기이자,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이 영화는 사랑 때문에 방황하는 청춘 특유의 여린, 금방이라도 찢어지거나 부서질 것 같은, 저돌적이면서도 애달프고 그렇기 때문에 눈부신 한 때를 잘 포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감독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흔들리는 화면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무척 감각적이고 아름답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번 보면 쉬 잊히지 않는 여운을 담고 있다. 감독의 연출력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또한 아름답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장국영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양조위만 생각났다. 이 영화는 양조위의 영화인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함께 행복해진다는 건 어떤 걸까. 그가 없으면 죽을 것만 같고, 그가 있어도 죽을 것만 같은 사랑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고 말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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