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 <올란도>를 보았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이 영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생각만 하고 있다가 우연히 올레티비에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VOD로 올라와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무료로! 그래서 내 오랜 열망은 너무나 쉽게 실현되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우선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책을 먼저 읽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각인시켜주는 영화보다는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칠 수 있는 활자를 먼저 읽는 게 영화를 감상하는데도 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책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일이고, 우선 나는 틸다 스윈튼의 올란도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므로. 일의 선후를 따지기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본 영화는 어땠냐고?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를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자기만의 방>은 읽은터라, 작가의 스타일을 대략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했고(물론 소설 '올란도'를 직접 읽어봐야겠지만),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와 어울릴 것인가 궁금했다. 끊이지 않는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의식의 흐름을 활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물며 400년의 세월 동안 성(性)만 바뀐 채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가는 이 거대한 이야기를!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주인공 올란도가 때때로 화면을 바라보면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것은 영화 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주인공이 겪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해준다. 봐, 이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왜 남성은 그럴 수 있고 여성은 그래서는 안되는 거야? 여성은 집을 가질 수 없다고? 도대체 왜? 올란도는 이런 의문들에 직면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성의 구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걸까? 생물학적인 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성은 그저 사회가 만들어놓은 통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이며, 폭력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시대에 이미 그것의 모순과 폭력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여성의 해방이 아니라 더 나아가 양성의 인위적인 구분을 뛰어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성을 지워버린 자리에는 인간만이,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오롯이 남는다.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올란도>는 아마도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주인공이 처한 설정 자체가 독특한 영화다. 이미 그 자체로도 이 영화는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틸다 스윈튼이라니!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처음 우리를 매혹한 그 흥분은 사라지고, 보다 묵직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남는다. 400년을 살아 겨우 한 인간으로 올곧게 서게 되는 올란도는 어쩌면 행복하리라. 그로부터 더 많은 시간이 지나 무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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