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시월의숲 2021. 5. 30.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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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개봉했으니 햇수로 4년 만에 이 영화를 보았다. 1편에 해당되는 <블레이드 러너>가 1993년에 개봉했으나 나는 당연하게도(?) 보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를 보지 못했으니, 속편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궁금할 리가 없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이 영화가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속편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감독의 전작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뉴스 기사나 텔레비전에서 언급되는 SF의 고전이라 일컫는 <블레이드 러너>를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이름을, 최근에 그가 감독했지만 아직 개봉하지 않은 <듄>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듄> 또한 <사구>라는 이름으로 1984년에 영화화된 적이 있는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듄>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렇듯,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원작을 읽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영화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언젠가는 보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이 나를 그 영화에게로 이끄는가. 마치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찌되었든, 볼 영화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든 간에 언젠가는 보게 된다. 비교적 최근에 보았던 <해피투게더>나 <올란도>가 그런 것처럼. 

 

영화는 전작을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재미있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SF 영화들이 나온 탓에 복제인간이라는 주제와 그에 담긴 철학적인 고뇌가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암울하고 황량한 미래의 묘사도 인상적이었지만, 화려한 네온사인의 도시에도 불구하고 미니멀리즘적인 미장센과 간결하고 단순한 화면의 색감과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인 라이언 고슬링도 고뇌하는 복제인간 역에 잘 어울렸다.

 

영화를 보는내내 그러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마치 파도처럼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모습은, 자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난 뒤의 만족감이랄까 혹은 해방감 뭐 이런 것을 환기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슬펐다. 그가 하나의 단독자로서(다시 말해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많은 고독과 외로움을 짊어지고 살아왔는지, 그가 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 먹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존재의 고독과 외로움, 슬픔이 어디 인간만의 것이던가? 복제인간이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자는 숙명적으로 고독하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며, 말수가 적고, 외로움은 오랜 친구이자, 눈빛은 저도 모르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는 자다. 세상에서 그는 혼자다. 나는 그와 다르지만, 그의 눈빛 속에서 얼핏 나를 본다. 내 속의 나, 나의 또다른 일면을 본다. 나는 그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뿐'이라는 <자기 앞의 생> 속 문장을. 오래전 내가 읽고 알 수 없는 위안을 느꼈던 것처럼, 너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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