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시월의숲 2021. 8. 8. 16:00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렇게 배수아는 썼다. 나를 포함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제발디언'들을 탄생시킨, 나에게 있어 첫 번째 제발디언인 그가 두 번째로 번역한 제발트의 첫 번째 책인 <자연을 따라. 기초시>의 옮긴이의 말에서다. 나는 아직 제발디언이라고 불릴 만큼 열렬한 제발트의 독자는 아니지만, 분명 제발트의 글은 내게 강력한 마력으로(매력이 아닌) 다가온다. 저 매혹적인 고백은 다름 아닌 배수아 자신의 제발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헌사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고백으로 인해 다시금 제발트를 내 안에 각인시킨다. 그리하여 배수아가 번역한 것이 아니더라도 제발트의 다른 책들을 찾아서 읽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따라. 기초시>라는 기묘한 제목의 이 책은 제발트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토성의 고리>를 통해 처음 만났던 제발트식 글쓰기와는 사뭇 다른데다 '기초시'라는 제목까지 붙여져 있어서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제발트가 시를? 하지만 형식이야 어떻든 이 책 역시 제발트 고유의 매력이 잠재해 있는(이후에 보게 되는 제발트식 글쓰기의 단초를 예감할 수 있는)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그뤼네발트의 세 폭의 <이젠하임 제단화>처럼, 이 책은 세 가지 이야기가 마치 세 폭의 제단화처럼 실려 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다른 제발트 소설과도 같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감할 수 있는 모종의 은밀한 연대 같은 것이 있다. 서로 마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 그런 느낌들이. 이건 정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것을 실제로 읽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읽고난 후 '눈앞에 고요히 떠오르는'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108쪽)과 '광기의 속삭임'이 마치 '약속된 종말'(134쪽)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슬며시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의 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파멸에의 예감이 이 책에서는 하얀 눈의 이미지로 마지막에 그려져 있다.

 

그는 어쩌면 계속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들에, 사회에, 자연에? 인간들이 자행한 거대한 과오를 직시하면서. 하지만 그 물음은 진정 의문에 가까운 것일가 아니면 체념에 더 가까운 것일까? 우리가 폐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서퍽 지역의 황무지 위로

광기의 속삭임이

퍼져나간다. 이것은

약속된 종말인가?

오, 돌로 된 인간들아.

이미 죽은 것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으리라. 삶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니.

지금 나에게 말하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뭐라고? 어떻게?

어디서 언제 말인가? 이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가,

아니면 전부인가?

물은? 불은? 선은?

악은? 삶은? 죽음은?(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