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하나의 세계를 건너온 사과잼과 같이

시월의숲 2021. 12. 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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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부터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 더욱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된다. 예전에는 그나마 주말에 어디든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나가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만 있어도 시간이 너무 잘 가서 아까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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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양파를 썰다가 그만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다행히 깊이 벤 것은 아니었지만 피를 보니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다. 다른데 정신이 가 있었던 것일까? 지혈을 하고 밴드를 발랐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만했다. 된장찌개 말고 다른 반찬을 몇 개 더 하려고 했었는데 하지 못했다. 아주 조금의 상처인데도 온몸이, 온 정신이 그곳으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상처란, 아픔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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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얻은 사과가 냉장고에서 골아가고 있었다. 이미 몇 개는 쪼글쪼글 줄어들었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씻어서 깎기 시작했다. 사과잼을 할 생각이었다. 아주 오래전(언제인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사과잼을 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그때는 아마도 처음부터 불을 너무 세게 해서 실패한 것 같다. 사과와 설탕을 버무려 냄비에 담고 불을 약하게 해서 끓이기 시작했다. 사과에서 물이 나오고 설탕과 함께 뭉근히 끓어오른다. 역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사과잼을 하나 하는 행위에도 하나의 세계가 들어있다. 아니,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강불과 약불 사이에도 수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과잼이 탄생하느냐 마느냐의 중요한 갈림길이 거기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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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의 시집 <레바논 감정> 읽고 있다. 너무 소설만 읽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시집을 읽고 있는데, 잘 읽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고 있다. 서정시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다른 느낌의 시집이랄까? 아무튼 시집을 읽는 시간은 소설을 읽는 시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언어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 가 닿으려는 몸짓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이 시집을 읽고 무언가를 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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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운전을 하면서 저녁노을을 보았다. 검붉은 색의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모자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운전 중이었으므로 나는 눈으로만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너무나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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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21년도 12월이 되었다. 모두들 저마다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겠지. 하나의 세계를 건너온 사과잼이 내 앞에 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내게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갈 것이다. 그 지나침이, '기억할만한 지나침'이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저마다의 세계를 잘 건너가 완성된 사과잼을 받아 들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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