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프란츠, 2021.

시월의숲 2022. 3. 9. 23:37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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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살아 있게 했던 것,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에서 당신을 구해준 것 역시 다름 아닌 당신의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술가는 오로지 창작을 통해서만 구원과 희망의 이유를 발견합니다.(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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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향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 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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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과 똑같은 테이블에 앉아 네 생각밖에 하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슬픔과 동시에 안온함도 느껴졌지. 죽음이 너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줬으니 한편으론 잘된 일이 아닌가.(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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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우리는 끝까지 수행했어. 때로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야. 네가 그런 방식을 만족스러워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만족했다고 해두자. 여기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어. 아니면 두 명의 가해자와 두 명의 피해자가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자, 그동안 늘 외면해온 내 죄를 너에게 자백하는 참이야.(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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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미치광이의 사랑이 이럴 거야. 두 미치광이의 사랑. 너를 떠나려고 노력도 해보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매번 모든 길이 너에게로 이어졌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질투심에 시달렸지.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였어. 그러나 누군들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만한 것이란 또 무엇일까?(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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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 기억해? "터너 이전에, 런던에 안개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이지. 그리고 너는 예술가였어.(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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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수집의 원동력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섹슈얼리티였다는 사실을 기자들이든 누구든 모든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섹슈얼리티 때문에, 그 성애적 발명품 속으로 내가 너를 밀어 넣고 고통을 치르게 했다는 것을,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회사, 소장품들, 그리고 우리의 삶까지,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존재했다는 것을 말이야.(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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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와 함께 탕헤르에서 찾아낸 집을 구입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 그때 내가 그랬잖아. "이브, 너는 지중해의 오랑에서 태어났고, 나는 대서양의 올레옹섬에서 태어났지. 탕헤르는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에 있어."(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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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과 권세를 우리가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우리가 수집하던 예술 작품들이 그랬듯이, 그것들은 단지 우리의 길에 놓여 있을 뿐이었잖아. 너는 예술가이고 나는 무정부주의자이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특히 나를 사업가로 결론지을 뿐이야. 아, 그들이 진실을 알았더라면!(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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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 쇼에 참석한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 갈채를 보낼 때 느꼈던 행복만 기억했으면 해. 애석하게도 그때의 기쁨, 그 한순간의 기쁨은 빠르게 사그라지고 이내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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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겐 스스로 그것을 창조할 권리가 있는 법이니까.(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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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호모섹슈얼은 타자 안에서 자아를 모색하고, 자기 자신과 맞서고, 그러면서 때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니까.(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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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플레옐에서 멋진 공연을 관람했어. 정명훈 음악감독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지휘했지. 극도의 정확성은 감수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늘 놀라곤 해. ······ 그게 바로 예술가들의 특성일 거야. 오직 극단으로 몰아붙인 엄격성만이 가능케 하는 정점에의 도달. 그 순간을 아는 이들은 세상에 무척 드물지. 너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어.(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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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옆에서, 너를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며 평생을 보냈구나. 너를 혼란스럽게 할 만한 것이라면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말하지 않았지. ······ 그 마지막은 네 죽음에 관한 것이었지. 너의 교모세포종에 대해,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어. 말해야 했을까? 물론 내 대답은 '아니'야.(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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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확신을 대체 어디서 얻는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어떤 확신이 내 안에 닻을 내려. 나는 심지어 이 취향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어. 왜나하면 나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없으니까.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튼, 어느 날, 신을 만난 것처럼, 낯선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바로 그때 너를 만났고 말이야. 나는 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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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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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무척 마르고, 너무나 젊고, 아름답고, 수줍고, 빛이 났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옳았어. 생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었잖아. 어떤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이 될 것인지는 나도, 너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나는 우리가 함께하게 되리라고 확신했어. 이것이 그때 벌어진 일이야. 너의 신뢰가 날 얼마나 감동시켰는지는 아무리 말해도 충분치 않아. 너는 너 자신을 내게 맡겼어. 평생에 걸쳐 네가 내게 보낸 신뢰를 얼마나 자주 체감했는지. 나에게 모든 결정을 맡긴 너는 어떤 계산이나 설명도 요구한 적이 없었지. 그 맹목적인 믿음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나를 뒤흔들어. 그것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증명일 테지.(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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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추억을 사랑했어. 기억이 너를 지켜준다고 믿었지. 그럼에도 너는 네게 가장 좋았던 시절이 아닌 동시대와 함께 호흡했지. 네가 기성복을 발명했다는 거 잊지 마. 무엇도 그와 같은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거야.(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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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 미학의 영토를 벗어난 것이야말로 너의 가장 큰 공로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샤넬이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너는 그들에게 권력을 되찾아주었어. 그들의 힘이 남성들에 의해 억눌려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았고, 그들에게 너의 옷을 입힘으로써 어깨에 힘을 얹어주었지. 이것이 네가 한 일이야.(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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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성지향성을 결코 숨기지도, 그렇다고 전시하지도 않았지. 그에 대해 수치심도, 동조를 바라는 긍지도 느끼지 않아. 물론 '프라이드 퍼레이드'라는 것이 있고, 나도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 성 소수자로서의 권리 획득에 대한 긍지를 표현하는 거잖아. 그러나 모든 것을 한데 담으려 해선 안 돼. 만약 우리가 보편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성적 지향성이 그러했기 때문일 테고, 그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동성애를 하나의 선택으로 말하는 것은 분개할 만한 일이야.(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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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타인에 대한 너의 무관심에 무척 놀랐어. 그것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그저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일종의 장애를 지닌 것이라고 받아들였지. 너는 그저 타인들이 다가오도록 내버려두었을 뿐이잖아.(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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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 덧없는, 패션이라는 직무를 사회적 행위로 격상시켰어. 다만 그 일이 네게 행복을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 너는 네가 길들인 유령과 늘 함께였어. 네가 그토록 두려워한 고독이 너의 가장 충실한 동지였지.(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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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이 편지에는 단 한가지 목표가 있었지. 우리의 삶을 결산하는 것. 네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과정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 요컨대 네게도 수없이 이야기했던 나의 추억에 불을 밝히는 것. 너와 함께해서, 그리고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여주는 것. 그리고 바라건대,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다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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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지막 편지이지만 결별의 편지는 아니야. 어느 날 다시 너에게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겠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 50년 동안 너는 나를 매혹적인 모험으로 데려갔지. 가장 광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섞이고, 현실은 거의 자리하지 않는 꿈속으로. 오늘,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생의 한 장이 끝났음을 너의 죽음이 알려준거야.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마법으로 나를 사로잡았지. 그런 다음 너는 벗어났어. 너의 모자로부터, 네 영감을 재단해 만든 드레스며, 인도와 중국에서 온 실크, 스쿠타리산 벨벳과 셰에라자드의 자수로부터.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내 눈 앞에서 너는 마치 무용 공연을 하듯 마법을 종결시켜버렸어. 그럼에도, 너에게 「벚꽃 동산」의 피르스가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어. "인생이라, 삶은 지나갔네. 도무지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오늘, 연극이 막을 내리고 조명은 꺼졌어. 서커스단의 천막은 해체되고, 나는 나의 모든 추억과 함께 홀로 남았지. 어둠이 내리고,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려와. 그러나 그곳에 갈 힘이 없네.(145~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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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불가능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었고, 행동하기에 앞서 방해물을 먼저 보는 이들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방해물을 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가장 말도 안되는 꿈을 실현할 수 있었죠. 우리는 진정 미치광이들이었으니까요.(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