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

시월의숲 2022. 3. 31. 17:26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하나도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의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23~24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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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해서 그러한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을 가졌었나,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집 떠나기 전날의 나는 확신하였다.(29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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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대해서 말해줘." 그가 차의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나는 아침에 담배 피우는 것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해. 그리고 비 오는 것을 넓은 유리창을 통해서 내다보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 것뿐이야?"

"응, 그런 것뿐이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있니?"

"아, 그런 것?" 나는 러시아워가 시작되어 정체중인 원효대교를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죽음밖에 생각나지 않아."(55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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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이제 오려고 하는 마지막 여름의 어둠을 향해서 나는 속삭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다. 멀리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산한 먼지바람 속에 서 있다.(83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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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술을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오래된 이야기들을 털어놓아요. 가슴에 담은 묵은 감정들을. 난 너의 등에 난 사마귀가 싫었어.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어. 사실은 이렇게 사는 것은 나의 꿈이 아니야. 날 붙드는 게 너무 많아. 그중에 가장 큰 것은 너야.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 때문에, 난 지금도 운동화로 얻어맞는 느낌이 들어. 이런 얘기들을 했어. 그리고 술이 깨어 유리창에 햇빛이 유난히 밝고 어린아이들이 학교로 떠나고 주방에서 생선과 야채를 끓이는 냄새가 단조로운 일상의 시작을 알리면 지난밤이 부끄러워져.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과는 술을 마시고 싶질 않아요. 어느 날 밤에 우연히 함께 술을 마시게 된 사람은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질 않아. 그 대신 난 커피를 마셔요."(111~112쪽, 「1988년의 어두운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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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는 묘하게 들뜬 분위기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상대방을 지치게 만드는 그런 타입인데, 개성이라기보다는 병적인 것이었다.(122쪽, 「1988년의 어두운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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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알 수 없는 음울이 익숙하고도 분명한 것이 되어갔다.(191쪽, 「엘리제를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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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의 소년은 누구나 고독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이 어린 네 명의 동생들 때문에. 그러나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불행한 소년이 너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간이 되면 돌아와야 하는 집과 마찬가지로 현실은 거기에 그냥 있을 뿐이다. 너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앉아 있게 될 것이다.(195~196쪽, 「엘리제를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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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는 준영의 손바닥 위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곳에서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어. 이해할 수 있겠어?"(215쪽, 「여섯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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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누워서 푸른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푸른 달이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요.(221쪽, 「여섯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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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달라. 어디론가 가라, 떠나가라, 하고 말하고 있잖아. 나는 집을 언제나 떠나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끝까지 오면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은 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정말로 멀리 가버리는 마지막 길이기도 하였어.(229쪽, 「여섯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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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서 모두 다 알고 자기 의견도 칼날처럼 분명하고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말하지. 하지만 모르겠어. 세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230~231쪽, 「여섯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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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가슴 설렘과 비극에의 예감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녀의 생에 아무런 결정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65쪽, 「아멜리의 파스텔 그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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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려고 하면 모든 것이 무척이나 복잡해지니까 그래."(277쪽, 「인디언 레드의 지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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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생적이었으면서도 진짜 엄마들이 그러는 것처럼 강요하지도 않았어. 착한 여자야."

"하지만 정말 엄마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지."

"왜 그렇게 생각해?"

"정말 엄마라면 착하다, 라는 표현을 절대로 쓰지 않아."

"그럴지도 몰라. 정말 엄마다, 아니다 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 여자가 정말 엄마라면 난 그 여자를 싫어하게 되었을 거야."(279쪽, 「인디언 레드의 지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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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의류회사에서 일한 사람도 그가 매일 저녁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셔대고 있다고 해도, 팬더마임 배우가 되고 싶었다든지, 밤에만 일하는 동물원의 수위가 되고 싶었다든지 하는 종류의 꿈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평생 동안 아무것도 안 할지라도 말이다.(281~282쪽, 「인디언 레드의 지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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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난 독립할 수 있는 타입까지는 되지 않나봐.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그렇게 편하고 일상이 아늑할 수고 없었어. 대상도 없는 투쟁 같은 걸 내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했었나 싶은 기분이야. 아침에 늦게 일어나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서 오랫동안 목욕하고 나와서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보고 나머지 시간은 커피만 마시면서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어때,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니.(301쪽, 「인디언 레드의 지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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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왜 영화에만 존재하는 걸까. 왜 영화는 사람들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거잖아. 모두들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사랑이 영원하기를, 청춘이 계속 아름답기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잊지 말기를. 그렇지 않아?(311쪽, 「인디언 레드의 지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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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요. 늑대들이 없어지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은요."

"말해주었잖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것으로 끝이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잊었을 거예요."(347쪽, 「검은 늑대의 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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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몇 개인가의 블랙홀이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익숙하였던 일들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 그곳으로 빠져들게 되면서부터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린다.(356쪽, 「검은 늑대의 무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