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시월의숲 2022. 4. 18. 23:53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14~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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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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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18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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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몇 겹의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검은 바위를 철썩거리는 파도처럼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밖에 말 못해서 미안하고, 가만히 있어서 미안하고, 미안하다고밖에 말 못해서 미안해지는, 어쩔 줄 모르겠는 밤입니다.(23쪽, 김행숙, 「질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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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뼈아픈 실수였다고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망각, 어떤 무지는 인간적인 약점이나 허점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윤리적인 구멍, 윤리가 사라진 비인간적인 빈자리인 것입니다.(24쪽, 김행숙, 「질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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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자신의 실수만을 선별적으로 잊어버리는 망각,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은 나아진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게 바로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이다. 우리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으로 선출한 권력은 자신을 개조할 권한 자체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 나아져야만 하며,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43쪽, 김연수,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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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도 진실이 밝혀진 적 없는 나라에서 이 글을 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발붙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63쪽,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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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65쪽,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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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가 갖는 감정이다. 고결한 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72쪽,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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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73쪽,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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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끔찍한 것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지. 잊을 수 있지. 그런 이유로 자 일상이야,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그들이 뻔뻔한 의도로 세월을 은폐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진상을 규명하는 데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은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일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초코바, 초코바, 같은 것을 자신들에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느냐고 아니 그보다 내가 좀 살아야겠으니 이제는 그만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밤이 돌아올 때마다 그처럼 어두운 배에 갇힌 아이를 건져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일상, 4월 16일 컴컴한 팽목항에서 제발 내 딸을 저 배에서 좀 꺼내달라고 외치던 때의 통증에 습격당하곤 하는 일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거듭, 거듭, 습격당하는 일상.

  왜 그런 일상인가.

  그의 일상이 왜 그렇게 되었나.

  그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그 세계에서 내 처지는 어떤가.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93쪽,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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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96쪽,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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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점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113쪽,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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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질문에 답해야 할까?"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이런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구하러 갈 수 있기를. 늦지 않은 때에 우리가 우리를 구출해내기를.(118쪽,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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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금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더냐? 알면서도 모르는 채 잘 살고자 했는데, 살아보고자, 의미도 만들고, 의미를 구성해서 인생 주변에 화환처럼 둘러놓고, 희망의 안대를 끼고, 이 세계의 처참한 장면들을 선별적으로 바라보고, 비극과 부정의와 참상에, 인간이 더이상 인간이 아닌 모습들에 눈감으며 살고자 했는데, 그걸 또 일러주는 자들이라니.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안 될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을 정도로 부서진 자들이 있다는 사실. 내 인생은 '금물'인데, 당신은 무엇을 하며 즐기고 있는가, 물어오는 자들.(147쪽, 김홍중,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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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바닷속 집단 멸절의 믿기지 않는 사태를 지켜봐야 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체제의 무력, 타자의 위험을 방관하는 세력의 비행, 죽음으로부터 약자를 구제하기에 애당초 너무나 무력한 국가의 공백을 목격했다. 카메라가 더이상 감출 수 없는 현장이 악몽처럼 드러났다.(152쪽,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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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수가 배의 복원력 회복에 필수적이라면, 공공성은 생명안보에 절실하다. 자본은 게걸스럽게 이를 사유화하고, 국가는 규제 완화를 통해 그 해체를 조장한다. 그래서 '국민'의 몰살이 초래되는바, 세월호는 이런 점에서 불량한 자본국가의 비극적 연장선에 있다.(163쪽, 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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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일상화, 그것만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길이다. 우리는 현재 윤리적 필연을 대면해야 할 결단의 시간을 살고 있다.(200쪽,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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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본 것은 무능력의 광경이었다. 그것도 집단적이고 총체적이 무능력이었다. 삼백 명이 넘는 승객이 구조되지 못한 상태에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침몰한 (혹은 침몰하도록 내버려진) 세월호의 비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혹은 아직도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그래야만 하는 현재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무능력 이외에 다른 말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203쪽,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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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것은 이 비극을 공적 재난이라기보다는 직접 당사자 각각의 과실을 파악하고 비교해야 하는 사적인 사고로 치부하려는 태도의 결과이다.(219쪽,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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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을 다룬다.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응답'의 대상이다. 사건이 정말 사건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산출한다. 진실이 정말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 진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때 해야 할 일은 그 진실과 대면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사건, 진실, 응답의 구조를 갖는다. 4월 16일에 일어난 일은 '세월호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대한민국의 진실을 못 본 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의 주인공이 진실에 응답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시해질 뿐이지만, 우리가 그런 일을 하면 죽은 사람들이 한번 더 죽는다.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불법이다. 같은 사람을 두 번 죽이기 전에 이 불법 정부는 기소되어야 한다.(229~230쪽, 신형철, 「책을 엮으며」 중에서)

 

 

 

 

인간은 무능해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또 인간은 나약해서 일시적인 공감도 점차 흐릿해진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230쪽, 신형철, 「책을 엮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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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좋은 문학이 언제나 해온 말이다.(230쪽, 신형철, 「책을 엮으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