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버지의 침대

시월의숲 2022. 5. 16. 23:30

아버지는 평소에 침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침대에서 생활하지 않았고, 커서도 침대를 가져보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침대에서 자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잡고 한참 뒤에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침대를 구입하게 되었지만, 그래 봤자 침대에서 생활한 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그 위에서 자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척 자연스러웠으며 특별히 침대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다 얼마 전 고모가 집에 놀러 왔다가 갑자기 아버지에게 침대를 사주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모에게 "침대?"라고 되물었고, 고모는 "그래, 침대." 하고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평소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잖니. 나도 허리 아파보니까 알겠더라. 허리 아픈 사람에게는 맨바닥에 자는 거보다 침대에서 자는 게 훨씬 좋아. 마침 네 아버지 생일이고 하니 미리 선물 하나 하는 셈 치지 뭐" 고모는 덧붙였다. 나는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아버지를 떠올렸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대뜸, "선물로 준다면야 마다할 일은 없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좀 멋쩍은 기분이 되어 고모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침대는 고모가 집으로 돌아간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침대가 온 날 나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침대커버를 사야겠다는 전화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알았다고 말하며, 우선은 집에 있는 이불을 깔고 주무시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다. 주말에 바로 침대커버를 사러 마트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침대커버를 사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대커버를 파는 곳이 많이 없으니,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안된다고, 이번 주말에 꼭 마트에 사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말했고, 주말에 대형 마트에 가서 침대커버와 패드, 베개, 이불 등을 샀다. 물건을 사는 내내 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침대가 오기 전날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배달기사한테서 침대가 배달될 거라는 전화를 받은 날 저녁에 잠이 다 안 오더라."

"잠이 안 왔다고요?"

"그래, 마치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그 정도로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단 말씀이세요?"

"그래,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더란 말이지. 허허."

"......!"

 

평소에 조금의 낌새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 고백 아닌 고백에 무척 놀랐다. 침대가 생긴다는 사실에 기뻐서 잠을 못 이룰 정도라니. 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니. 그렇게 말을 하는 아버지는 평소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내가 익히 알고 지내던 아버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 아이의 마음을 가진 순수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자못 충격이었고, 새로웠고,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아버지라고 해서 처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것은 아닐 테니까. 그 자명한 사실이 왜 이토록 새롭고 미안하게 느껴지는지. 

 

오래전부터 집에 있던 여러 조악한 장식품들이 이제는 아버지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다. 아버지는 내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라. 여기에 딱 어울리지? 아, 그리고 여기에 불도 켜진다." 아버지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오, 잘 어울리는데요! 불도 켜지네요!" 나는 연신 감탄하면서 대답한다. 그래, 처음부터 없어서 못했던 것뿐이지, 있으면 누구보다 열렬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니 '원래 그런 사람'은 애초부터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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