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지금 이 순간

시월의숲 2022. 5. 24. 23:04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았다. 실로 오랜만의 공연장 나들이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난 2년 동안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은 데다, 마지막으로 뮤지컬을 본 지가 언제인지, 무슨 작품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이번에 본 뮤지컬은 순전히 즉흥적으로 예매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내가 그것을 기다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언젠가는 볼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공연을 보러 간 지난 토요일은 살짝 더운 듯했지만, 화창한 날씨였다. 좀 일찍 도착한 우리들은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한 후에 공연장에 도착해서 지정된 좌석에 앉아 뮤지컬을 관람했다. 

 

신기하게도, 뮤지컬을 보는 내내 모든 노래들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유튜브나 방송 등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한 번쯤은 들어봤기 때문일까? 그만큼 유명한 작품이라는 뜻 이리라. 극의 흐름이 무척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여러 가지 무거운 주제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선과 악이라는 테마, 분열된 자아, 계급 갈등, 악은 스스로 또 다른 악을 처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등.

 

주제도 주제지만, 장르가 뮤지컬이므로 노래가 그 주제들을 전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넘버들이 다 적절하고 좋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넘버는 지킬이 부른 '지금 이 순간'과 루시가 부른 '시작해 새 인생'이었다. 지킬이 자신의 몸에 선과 악을 구분해 낼 거라고 믿는 약물을 주입한 후 부르는 현란하고 파괴적인 변신(분열)의 노래들도 물론 좋았지만, 그것은 지킬의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한 흥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부른 이후의 지킬의 운명과 '시작해 새 인생'을 부른 이후의 루시의 운명은, 그 노래들에 담긴 강렬한 삶의 의지에 반하여 너무나 비극적이지 않은가. 삶에의 의지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의 검은 수렁은 더욱 깊어진다는 말일까. 나는 그 모순적인 비극성에 이끌렸고, 그것이 이 뮤지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유독 많은 이들의 부름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적인 멜로디나 가사 외에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순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그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오직 그 '순간'만 존재하지 않는가. 새로운 삶의 의지가 샘솟는, 환희에 찬 그 순간만이. 현실에서의 순간은 뮤지컬 혹은 다른 모든 이야기들과 달리 그 순간이 지나고 난 후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노래를 결코 부르지 않으리라. 그것을 안다면 남는 것은 오직 절망과 비극의 노래뿐일 것이므로.

 

하지만 우리에겐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어 순간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도 결국엔 '순간'의 빛과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리워하는데 바쳐진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가 뮤지컬을 보고 이야기를 읽는 것은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현실의 '순간'에 담긴 치명적인 비극성을 재빨리 눈치채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늘 같은 희망을 부르짖는다. 알 수 없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인간이라고 누군가는 말하리라. 우리가 늘 '지금 이 순간'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것이 늘 새롭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사는 것과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은 생각을 낳고, 순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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