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부엉이에게 울음을

시월의숲 2022. 8. 8. 21:19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116쪽)

 

그렇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는 스물아홉 살에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하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는 잊고 있던 과거의 다락방 시절을 떠올린다. 자신이 '책들의 바다에서 홀로 표류하던 시절' 그러니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던 시절'의 기억을. 

 

그 시절을 그녀는 '홀로'의 세계라고 명명한다. 그곳은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졸음과 잠 사이의 불명확한 시간, 현기증과 침울함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기찻길' 같은 세계였다. 그녀는 그 세계에 이끌렸다. 그 세계의 풍경, 그러니까 다락방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다락방은 나의 유모였고 난파선이었다. 다락방은 최초의 말이었다. 내게로 찾아온 말이자 나로부터 발생하는 최초의 말이기도 했다. 다락방은 소리였고 감촉이었고 냄새였으며 불안이자 쾌락의 느낌 그 자체, 앞으로 전 생애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게 될 모든 것이었다."(120쪽)

 

그 세계를 어찌하여 잊고 있었던가! 그녀는 또 말한다. 

 

"다락방은 점치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를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내 시간은 어느 순간에 과거와 미래의 길로 갈라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들은 점점 많아진다. 마치 내가 읽는 책처럼. 나는 이 얼굴이고 동시에 저 얼굴이다. 그들은 서로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다. 운명은 하나이자 동시에 천 개다.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운명을 갖지는 못하리라.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얼굴을 갖지는 못하리라. 오늘은 어제인 동시에 내일이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속삭이고 있다."(120~121쪽)

 

그녀는 다락방에서 이 책과 저 책들 사이에서 먼지처럼 유랑하듯 떠돌다가 불현듯 신탁을 받는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하지만 확실하게 깨닫는다. 그녀의 시간이 어느 순간 과거와 미래의 길로 갈라지며,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그들은 점점 많아지며, 그녀 자신은 이 얼굴이고 동시에 저 얼굴이 된다는 것을.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천 개의 운명을 가지게 될 것임을. 

 

그리하여, 이 소설 속에서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소설의 화자인, 스물아홉 살의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한 '나'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가 신청한 이혼 서류의 발급을 담당하는 구청의 공무원이기도 하고, 그녀가 다락방에서 발견한 이름 모를 사진 속 인물들이기도 하며, 그녀의 남편이 보내 준 잡지의 투고 글을 쓴 작가 지망생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모두 느슨하게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녀 자신이 이 얼굴이고 동시에 저 얼굴'이 된다. 

 

이것은 최근(아니 상당이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저자의 소설들에서 보이는 일관된 경향처럼 보인다. 존재의 중첩,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파편화된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이전 소설들보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의도된 모호함이 비교적 덜 혼란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다락방'으로 상징되는 이야기의 원형(비밀)이 소설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존재의 근원처럼.

 

서로 겹쳐지는 혹은 분열되는 존재들은 모두 다락방의 시절로 수렴된다. 아니, 다락방의 시절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

 

"내 손에는, 잠이 들기 전까지 읽었던 것과는 다른 책이 들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스스로 나를 찾아온 내 꿈의 책이었다. 그것이 여인의 젖처럼 요람처럼 나를 키웠다. 나는 눈꺼풀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우연의 의도에 의해 내 손 안에서 펼쳐져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페이지의 구절들을 읽었다."(119쪽)

 

이것은 그녀―혹은 작가 자신이 과거에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하게 될 수많은 '나'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자신의 손 안에서 펼쳐져 있던, 제목도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그 책들의 페이지를 읽는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수많은 그녀들을 통해 비로소 자신과 타인 속의 자신, 자신 속의 타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들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나로 수렴되고, 나를 통과한 이야기들은 결국 같지만 다른 무수히 많은 '나'로 파생된다. 신탁의 예언은 실현되고, 그녀는 스스로 무녀가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속삭이는.

 

다락방의 시절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생애 두 번째 이혼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기보다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면의 필연적인 어떤 작용 때문이리라. 글자들의 숨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리라. 소설 속 화자의 아래와 같은 고백은 비단 작중 인물의 고백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각거리는 글자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나는 어쩌면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지적인 훈련이나 재능도 없이, 그 어떤 준비나 지식도 없이, 오직 부엉이의 울음을, 오직 밤의 징후를, 해독할 수 없는 다락방의 문자로 옮겨 쓰는, 개연성 없는 문장들 사이로, 서툴게 말 더듬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