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하다고

시월의숲 2023. 1. 7. 16:06

바르셀로나에서 사라고사로 가던 중 들렀던 휴게소에서


내 여행은, 작가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내가 있는 장소의 이동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 하다고.

- 배수아,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중에서


*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나는 꿈과 현실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기운과 시차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스페인에 도착해서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수시로 깨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적응하는 것인지 저항하는 것인지 모를 몸과 마음으로 낯선 이국에서 십여 일을 지냈다. 다녀오니 한 해의 마지막이었고 곧 새해가 시작되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한동안은 차원이 다른 피로가 어두운 구름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페소아의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꿈과 삶의 뒤범벅인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마치 '잠과 꿈 사이에, 나와 내 안에 있는, 내가 나라고 치는 사람 사이에, 끝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끝없이 이완되고, 또 수축되었으며, 분열되었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잠 속에서,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과 꿈의 경계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그 혼몽의 사원에서 또렷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고,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 꿈에 대해서, 꿈의 흔적에 대해서,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 특별했던 혹은 특별할 것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든 쓰고 싶다고.


*
제목에 대해 고민했다. 블로그에 <어느 푸른 저녁>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었지만, 일상의 이야기가 아닌 '여행'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었다. 이런저런 제목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꿈의 흔적' 혹은 '미리 들여다본 꿈'으로 할까? 아니면 기형도의 시 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로 할까? 그것도 아니면 페소아의 에세이나 시에서 가져올까? 딱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문득 고개를 들어 책장을 올려다보았는데, 거기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가 꽂혀 있었다. 그 순간 제목은 정해졌다. <토성의 고리>는 소설이지만, 폐허를 찾아 떠난 여행기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내가 이곳에 쓰고자 하는 것들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내가 바란 여행과 내가 실제로 한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달랐고, 앞으로도 다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내 의지로 하는 여행이란 지금까지도 좀처럼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하지만 내 의지로 하는 여행일지라도 그것이 내가 바란 것과 부합하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애초에 나는 무엇을 바란 것인가?). 여행의 특성 중 하나가 능동성이라면,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무계획적이며 즉흥적인 여행자인 것이다.

그러면 그런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나는 그 어긋남에 대해서 쓰련다. 내 여행은 배수아 혹은 페소아, 제발트의 그것과도 물론 다를 것이지만, 그것의 영향 아래 쓰일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영향 아래 있다 하더라도 내 여행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내 여행은, 내가 느끼고 보고 생각한 것들, 나를 통과해 스쳐 지나간 것들의 기록일 것이므로. 배수아나 페소아 혹은 제발트는 그런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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