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 순간 아이가 느꼈을 경이에 대하여

시월의숲 2023. 2. 15. 21:46

어제저녁에는 깜짝 눈이 내렸다. 아주 짧은 시간 내리다 그쳤으므로, 그 순간 눈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였다. 나는 그때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거기, 출입문 앞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꼼짝도 않고 서서, 한껏 고개를 젖힌 채 눈이 흐트러지게 내리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마치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미동이 없었다. 집중하고 있는 아이의 주위에는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정적마저 감도는 것 같았다. 저 눈, 그래, 저 아이를 꼼짝 못 하게 사로잡은 것은 분명히 저 눈이었을 테지. 입을 벌리고 눈을 받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아이는 입을 꼭 다문채 눈이 내리는 허공을,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 그 아이를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에서 하얗고 가벼운 것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가로등은 마치 조명처럼, 내리는 눈을 비추었다. 그 순간 아이가 느꼈을 그 경이를 나 역시 느껴보고 싶었다. 아이를 사로잡아 짧은 순간이나마 망부석이 되게 한 그 신비를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 내리는 눈보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경이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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