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선호한다. 그런 순간의 언어적 확장을 선호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긴 하루의 서막을 알리지만, 비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시선.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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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동안 그곳을 지나다녔다. 아니 지나다녔다는 말은 맞지 않다. 나는 그곳을 그저 지나쳤다.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그곳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벚꽃이 만개했고, 그럴 때면 꼭 저 길을 걸어봐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 마음을 한 번도 실천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마음은 있는데 왜 행동으로 옮기질 못했을까.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날씨가 무척 맑았고, 벚꽃이 지천에 피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다가 문득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이런 날에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충동에 나조차 어리둥절했다. 조퇴를 해야겠어. 나는 생각했다. 조퇴를 하고 사무실을 벗어나야지.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숲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운전을 하여 집으로 오다가 문득 그 숲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몇 년간 가보고자 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그 숲을. 마치 비밀로 둘러싸인 것처럼, 벚나무로 둘러싸인 그 숲길을. 봄만 되면 하얀 띠를 두른 듯 눈부시게 환했던 그 숲을.
그 숲길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차를 세워놓을 만한 공간은 별로 없었다. 숲의 초입에 있는 자그마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살은 눈부셨고, 벚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주고 있던 내 몸의 힘을 최대한 빼고 천천히 걸었다. 길 옆에는 냇물이 흐르고, 냇물을 따라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숲은 냇가와 자그마한 야산 사이에 심긴 벚나무를 따라 쭉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느끼며 그 숲을 걸었다. 숲은 내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긴 하루의 서막을 알리지만, 비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 숲을 '비밀의 숲'이라고 부른다. 발설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숲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숲은 그저 숲의 일을 할 뿐. 어쩌면 모든 숲은 저마다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숲길을 걸을 때면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이곤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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