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동백은 세 번 핀다고

시월의숲 2023. 4. 14. 22:16

 

동백이 지천인 곳에 다녀왔다. 발 디디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동백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꽃은 거의 진 채였지만. 동백꽃을 이렇게나 많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닥에 흐드러지게 떨어진 붉은 꽃을 밟으며 동백나무 숲길을 걷는 일은 특별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어떤 비감(悲感)을 두른 것이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해설사는 말했다. 동백은 세 번 핀다고. 처음에는 나무에, 두 번째는 바닥에, 세 번째는 우리들 마음속에. 참으로 적절한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닥에 '핀' 붉은 동백꽃을 밟을 때마다 느껴지던 그 아득한 아찔함에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 누군가는 동백꽃을 피꽃이라 했다지. 나는 순간 동백꽃을 노래한 이 세상의 수많은 시들을 떠올렸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그 시들을 마치 다 읽은 것처럼. 그 비밀스러운 슬픔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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